유학생으로 와서 미국에서 지금까지 살아 남은 건 기적의 연속

  • #3422099
    d 174.***.129.235 4170

    이제는 이 사이트에 잘 오지 않지만 우연히 제가 6년 전에 올린 글을 발견했습니다.
    https://www.workingus.com/forums/topic/취직-못하고-한국-들어가게-되면-어떻게-되는-걸까요

    이 때 인턴이 하도 안 구해져서 겨울 방학에 산호세에 무작정 갔는데 거기 있어도 안 구해지는 건 마찬가지라 우울해져서 하숙집에서 며칠간 누워만 있었습니다.

    낭떠러지에 내몰린 심정이었습니다.
    당시 CS로 전공을 바꾼 게 겨우 1년 전이라 4학년이었습니다. 1년 학교 더 다닐 집안의 경제적 여력이 안 됐고 사실상 인턴을 못 구하면 미국 생활은 끝이었습니다.

    인턴을 구하면: 봄 co-op과 여름 인턴을 하면서 6개월을 벌고 가을학기 다니고 그 다음 봄 학기도 파트타임으로 들으면 또 6개월이 생기니 경험을 쌓고 공부를 해서 취업에 도전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인턴을 못 구하면: 봄학기 다니고 졸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인턴도 못 구하는데 취직은 불가능하니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글을 올린 1월 4일 토요일은 겨울방학이 끝나기 겨우 보름 전이었습니다. 부모님께서 경비를 지원해주셔서 어렵게 왔는데 빈 손으로 돌아갈 생각에 막막했습니다.
    그리 오고 싶던 미국에서 학교 다니면서 ‘한국에 들어가면 나는 할 게 노가다 밖에 없다’는 위기감에 매일 자신을 채찍질 해왔는데 이렇게 한국에 갈 생각에 허탈했습니다. 빨리빨리 문화, 상명하복 문화, 술 문화, 경쟁, 자격증 시험, 비교질.. 어느 것 하나 맞질 않아 암울했습니다.

    그 다음주에 테크니컬 인터뷰 두 개가 잡혀 있었는데 무기력해져서 준비도 하기 싫었습니다.

    그보다 3주 전, SFO공항에 도착해서 처음 산호세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밤에 도착해서 하숙집 아주머니가 라이드를 해 주셨는데, 눈만 오던 학교 주변과 비교되는 풍경이었습니다. 101 고속도로를 따라서 말로만 듣던 아마존 로고도 보이고 무슨 스탠포드 이름도 보이고, 선선한 바람이 차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면 솔솔 불어오고..
    지금 생각하면 그 설렘 덕분에 인턴을 못 구한 가을 학기의 실패를 잊고 의욕을 가지고 3주간 버틴 것일지도 모릅니다.

    3주간은 타는 간절함으로 구직을 했습니다.
    중고 자전거를 샀습니다.
    기차역까지 자전거로 50분은 걸려서 어딜 가든 왕복 4시간은 걸리는데도 몇 일에 하루 정도는 meetup을 가고 나머지 시간은 인터뷰 공부를 하고 링크드인과 엔젤리스트로 무작위로 커넥션 신청을 했습니다.
    Caltrain과 자전거로 meetup이 있는 곳은 샌프란시스코든 멘로파크든 갔습니다.
    가서 괜찮은 회사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얼굴에 철판 깔고 좀 도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혼자 자전거로 다니다 보면 여러 회사 건물들을 지나치고 셀 수 없이 많은 회사 이름들을 보았습니다.
    회사 이름을 읽어보기도 하고 저런 회사에서 일하는 건 어떤 경험일까 상상도 해 보았습니다.
    그 앞에 작아진 것 같아서 눈물이 난 적도 있었습니다. 힘들었던 상황이라 여러 요인들이 섞인 눈물이었을 겁니다.
    소리내어 울기도 했습니다. 도로 갓길에서 자전거를 끌고 가면서 혼자 우는데 차들은 무심하게 쌩쌩 달리고 소음에 우는 소리도 묻히고 세상에 혼자 된 느낌…

    그렇게 하다 보니 진이 빠졌던 걸지도 모릅니다.
    하도 돌아다니니 배가 고파서 많이 먹어야 하는데 하숙집 아주머니는 눈치를 주니 미안하면서도 서럽고…

    아무튼 그 주말도 지나고 금요일이었습니다.
    테크니컬 폰 인터뷰에서는 하이어링 매니저가 Array를 shuffle 하라는 문제를 물었습니다. 정답을 몰랐습니다.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랜덤이며 확률이며 아는 것 다 갖다 붙여서 대답했지만 마지막 인터뷰도 이렇게 정말 끝이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은 방학 기간은 겨우 1주일. 애초에 1년 반 남짓 컴퓨터 공부해서 인턴 구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했고, 그 주말에는 희망고문에 지쳐 체념을 하고 학교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차라리 덜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주말이 지나고 리크루터한테 보이스메일이 와 있었습니다. next step을 얘기하자는데 기쁜 마음도 잠시, 온사이트 인터뷰는 어떻게 뚫지 걱정부터 들었습니다.
    전화를 했는데 verbal offer를 받았습니다. 봄 인턴이라 그런지 그냥 온사이트 없이 오퍼를 준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제가 얼마나 기뻤을지는 위에 제 상황을 통해 짐작이 가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처음에는 실감이 안 나서 그냥 웃음만 나왔습니다. 제가 그 회사에서 일 할 거라고는 상상을 못 했습니다. 당시 대단한 회사였어서…

    (아무튼 그래놓고 다른 리크루터가 온사이트를 오라길래 다시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가 그건 그냥 회사 시니어급들 만나는 자리라고 해서 안심하고, 비자/학교 제도상 봄 인턴이 허용되는지 확실히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봄 인턴을 구했는데 그게 안 될까봐 또 조마조마하고 그 후에도 수 차례 지옥과 천국을 오갔습니다…)

    처음 출근하던 날 2월 3일은 겨울인데도 회사 캠퍼스에 벚꽃이 가득 피어 있던 기억이 납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지금 저는 샌프란시스코에 자리를 잡고 잘 살고 있습니다.
    2014년 겨울은 미국 생활 하면서 당시에 맞은 가장 큰 위기였지만, 그 후로도 그 만한 위기가 열 번 정도는 닥쳤습니다..
    그러다가 작년 정도부터 좀 안정이 되었습니다.
    굴곡 가득한 인생을 살다가 안정이 되니깐 욕심이 많아지다가도 힘들었던 시절, 그 때 도와줬던 사람들, 망할 뻔한, 아니 망할 수밖에 없던 그 많은 위기들과 그 때마다 기적적으로 얻게 된 second chances를 생각하면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workingus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당시엔 불안해서 매일같이 글을 올렸고, 답글에는 험한 말 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도움 주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말 나온 김에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CS 마이너나 해서 경제학 리서치 잡이나 얻으려던 제가 CS로 전공을 바꾸고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된 데에는 이 사이트 사람들 조언이 많이 작용 했습니다. 그나저나 엔지니어 첫 1~2년은 일하면서 머리가 뽀개질 정도로 스트레스 받더군요…

    아무튼 미국에 배경 없이 와서 자리까지 잡은 1세대 분들은 정말 뛰어난 분들이든지 아니면 수많은 역경을 이겨낸 분들이든지 만나보면 대단한 분들이더라고요. 미국에 남고 싶었지만 여건이 안돼서 안타깝게 한국에 돌아가신 분들도 마찬가지고요. 사연 없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아요.

    가끔은 영어 때문에 위축되고 타지에 가족도 없이 혼자 사니 서러울 때도 있겠만 그 때마다 지나온 고개들을 돌아보며 자긍심을 갖고 당당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이젠 나도 끝났다고 생각할 때마다 도움을 준 사람들을 떠올리며 감사함과 겸손을 마음에 되새길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이 모든 걸 당연시하던 저였는데, 우연히 발견한 예전에 올린 글 때문에 자신을 되돌아보게 됐군요.

    • 325I 174.***.8.235

      항상 응원 합니다. 저도 유학 시절부터 지금 영주권 프로세스 막바지까지 돌아보면 항상 외줄타기가 아니었던 적이 없네요. 육군 훈련소에 있늘때 저희 중대장 님이 항상 그러셨죠 “내일은 오늘보다 낳을거다.” 훈련소 마치고 후반기 교육 받으러 떠나는버스 타는날 버스 앞에서 한명한명 악수해주시며 활짝 웃으며 짜식 고생 많았다 등 두드려 주시던 생각이 납니다.

      지금의 그 겸손한 마음 잃지 않으시고 나중에 더 높은 곳에 올라가셔서 예전의 원글님과 비슷한 처지에 누군가가 있으면 따듯한 말 한마디 해주시고 도와 주시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항상 건승하시고 응원 하겠습니다!

    • 12345 69.***.39.157

      수고하셨습니다

    • 저는 174.***.135.91

      울컥하네요. 수고하셨어요.
      저도 샌프란쪽 사는데 여기살아남기 참 힘들죠.
      혼자시라니 더 외롭고 하시겠지만…
      언제나 화이팅입니다.

    • iopuy 96.***.20.195

      원글처럼 미국에 처음 정착하는게 말처럼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이민 1 세대들을 보면 다들 대단한 분들이라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는게 원글과 비슷한 경험 또는 그보다 더한 경험들을 모두 극복하고 현재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타국에서 언어와 문화조차 틀리고 보이지 않는 차별까지 당하면서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한인들 정말 대단합니다.

    • 정말 100.***.1.14

      정말 공감합니다. 얼마전에 영주권을 받고 유학생으로 시작한 미국생활을 돌아보았는데. 그 치열했던 모든 순간이 돌아보니 기적, 타이밍, 운명적으로 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ㅠㅠ 샌프란시스코에 몇년정도 살았는데 좀 외롭고 무서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안전하게 잘 지내길.

    • 아스팔트 사나이 73.***.16.13

      이런 글들이 실제로 미국에 자리를 잡고 싶은 후배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저도 전공은 틀리지만 조만간 여기에 정착 후기를 남겨 보렵니다. 각 전공 분야별로 경험담을 남겨보심들이..

    • 172.***.44.255

      좋은 정착 후기글 감사합니다. 저 역시 유학생활과 영주권 그 후의 삶을 살고있지만 신분해결은 정말 철저한 준비와 운이 함께 해야한다는걸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더군요. 지금 준비하시는분들 모두 화이팅하시고 원글님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앞으로 꽃길만 걸으시길 바랍니다.

    • 지나가다 104.***.166.31

      이게 바로 이싸이트의 존재이유입니다. 하도 많은 쓰레기글들 때문에 요즘 정내미가 떨어졌지만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거나 내가 도움이 필요할때 도움을 받을수 있는 가장 쉽게 접근할수있는 사이트가 바로 여기 입니다 다들 새해에도 좋은일 많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 나무 173.***.233.225

      너무 좋은 고백과 글에 감동 받았습니다. 이 공간 애서 나누어야 할 부분을 먼저 이끌어 주심에 감사하고요! 마음이 좀 따듯해지는 기분이에요. 전쟁같이 월요일이 기다리지만 좋은 쉼이 있는 주말 되세요!

    • ㅁㅁ 75.***.250.213

      기적같아 보이는 일도 원글님의 엄청난 노력과 실력이 있어서 실현된 거죠. 간만에 훈훈하고 감동적인 글을 보니 저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 ?? 72.***.2.244

      이 글을 읽고 힘내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겁니다. 좋은 글 잘 봤습니다.

    • 지나가다 70.***.68.140

      정말 간만에 훈훈한 글이네요. 원글님도 저도 정착해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정말 열심히 살아왔고 운 좋은 사람들이죠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 47.***.36.151

      매섭게 자기를 몰아치던 때에 흘리던 눈물. 그 덕에 단단해지고 더 성장한 나를 발견하지요. 감사함과 겸손. 귀한 덕목을 언급하셨네요. 계속 분발하여 마침내 거목으로 우뚝 서십시오.

    • 같은처지 73.***.26.92

      저도 비슷한 처지의 학생입니다 현재.
      인턴을 구하고싶은데 어렵습니다.
      한번 만나뵙고 싶습니다. 샌프란쪽 살아요.

    • 65478 140.***.140.31

      축복받은 원글과 무수한 댓글들의 은총스러움을 보면서
      지난 주일날,
      오랜만에 컴교 신앙간증회가 성공리에 성황을 이루었음을 확인합니다. 할렐루야!

      우리 컴퓨터 주님이 강림하신 성스러운 샌프란시스코는 비록 적그리스도 후손들인 노숙자들의 똥덩어리들이 길거리를 가득채우고 있더라도, 주님의 디지털 성스러움으로 정화시켜왔음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역시 믿는자에게 복이 있음을 축복받은 원글의 신실한 간증을 통하여 다시한번 목격합니다.

      아멘!

    • 잡오퍼 72.***.0.185

      이분같은 멘탈이어야 버티는구나..
      배워갑니다.

    • Sun 107.***.230.128

      저역시 opt로 회사 구하고 있는데 너무 힘들고 지쳐서 포기해야하나 할정도로 무기력한 삶을 살고있어요 그러다
      우연히 이 글을 봤는데 너무 큰 힘이 되네요ㅠ혹시 괜찮으시면 취업관련해서 여쭤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 Ana 73.***.204.152

      예전 글, 지금 글 읽고 더 힘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30이 넘었고 가진것 없는 싱글맘이라 CS 시작하기까지 고민도 많았습니다. 앞으로 3년 정도는 더 해야 opt 라도 받을 수 있겠지만. 많이 지쳐있던 저에게 할 수 있다라는 희망을 갖게 해주는 글이었어요. 더 힘내서 앞으로도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