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을 보내면서

  • #3412801
    czber65 99.***.218.46 828

    2019년을 보내면서, 나는 2019년동안 가장 많이 내가 내 자신에게 독백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니,
    작년과 마찬가지로 “하마터면 열심히 일할뻔 했다” 라는 것이다.

    주어진 일이라는것은 또는 해야할 일이라는 것은 정성들여 사력을 다해서, 결국 다른 누구의 것 보다도 더 좋아 보이는 결과물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라 어릴때 부터 훈련 받아왔던 나는, 10년전 다니던 사기업에서 아무런 이유없이 갑자기 레이오프 당할때까지, 이와 같은 자세로 일해 왔고, 그러한 결과물인 나의 업무성과에 대하여도 거의 대부분 좋은 평가를 받았다. 물론 거기에 따른 연봉도 높았었다. 오랜기간 훈련의 결과는 우리생각이 그것을 더 이상 하지 않으려 해도, 우리들의 몸은 그것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의식은 또다른 훈련이 오랜기간 수행되지 않는한 무의식을 결코 컨트롤 할 수 없다.

    하여튼, 나는 레이오프를 당했고, 레이오프에 대한 아무런 논리적 이유를 발견치 못하다가, 레이오프를 결정하는 자들이 일을 열심히 하는 인간들이 아니라, 남들을 등쳐먹는 방법에 뛰어난 자들임을 알아차리고 나선, 나는 더이상 일에 대한 욕심을 영원히 포기해버렸다. 지금은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일할때마다 스스로 수없이 되뇌인다.
    “하마터면 열심히 일할뻔 했다”를

    2019년을 보내면서 자신의 단상을 간단히 적은 어느 여성학자의 아래와 같은 글을 읽었다. 그녀의 글은 언제나 그랫듯이 쓰고나서 다시읽고 고치고 또 다시 쓰고 한 흔적이 역력하다. 나는 그 덕분에 진정으로 공감했고, 여러번 반복해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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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병으로 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진 불교의 경전 ‘보왕삼매경(寶王三昧經)’의 첫 구절이다. 학설이 분분하지만, 중국 명나라 때 고승 묘협(妙협)이 지은 <보왕삼매염불직지> 중 일부라고 한다. 이 삼매경은 같은 운율로 구성되어 있다.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공부하는 데 마음의 번잡함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수행하는 데 마(魔)가 없기를 바라지 마라,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마라,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마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하기를 바라지 마라, 공덕을 베풀려면 보답을 바라지 마라, 분에 넘치는 이익을 바라지 마라, 억울함을 당했다고 밝히려고 하지 마라. 바라지 마라. 행복에 대한 소망은 화를 부르니, 인생고를 받아들이고 재해석하라는 뜻이다.

    원말명초때 작품이니, 인생이 고달프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이 글귀에 위안을 얻는 이도 있겠지만, 답답한 이도 있을 것이다. 후자의 경우 다음과 같은 의심이 들 수 있다. 이런 말을 따르다 사기만 당하는 것은 아닐까. 포기와 실패를 합리화하는 것은 아닐까, 억울하면 저항해야지 참으라고? 이것은 지배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하지만 보왕삼매경은 포교가 아니라 삶의 조건을 말할 뿐이다.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노력하든 마음을 비우든, 어차피 인생은 결핍을 인정하고 대처하는 일이다. 섣달그믐날 자정 1초 뒤에 갑자기 다른 세상이 오는 것도 아닌데, “희망찬 새해”가 난무하는 때가 왔다. 희망을 갖자, 희망을 달라, 희망이 있어야 살지. 나는 희망을 숭배하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희망, 소망, 원망(願望). 모든 바람은 실상, 원망(怨望)이 되기 쉽다.

    바람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지 실제도 인식도 판단도 아니기 때문이다. 희망은 불가능한 관념이다. 희망은 미래를 상정한 사고방식인데, 미래(未來)는 글자 그대로 영원히 오지 않는다. 이 때문에 희망의 속성은 끝없는 지연(遲延)이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이지, “지금 그렇다”가 아니다. 흔히 종교가 희망과 위로를 준다고 하지만 종교의 본뜻은 아니다. 종교(宗敎) 역시, 문자 자체에 충실하다. 종교는 ‘으뜸 가르침’이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마법이 아니다.

    라인하르트 코젤렉의 지적대로, 근대에 이르러 인간의 경험은 과거로 치부되고 극복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시간의 서열이 생긴 것이다. 인간의 사유가 ‘지금, 여기’에서의 인식이 아니라 ‘이후에 원하는 의미’로 변화한 것은 문명사적 사건이었다. 인류는 미래의 포로가 되었다.

    현실과 희망이 일치하는 경우는 없다. 희망 달성 이후 더 높은 희망, 과제, 욕망이 생긴다. 여기서 우리는 진짜 불행에 포획된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다.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우리 몸은 통치의 담보물이 된다. 오늘날, 이 통치는 지구를 칭칭 감고 있는 자본주의의 그물 속에서 힘겹게 생존하는 주체적 종속의 시대를 열었다.

    주체적 종속의 엔진은 우리 자신의 욕망이다. 욕망과 희망은 어감의 차이가 커 보이지만, 희망은 욕망을 부드럽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더 벗어나기 어려운 권력이다. ‘희망 고문’이 가장 쉬운 예다. 기대가 클수록 만족보다는 부담이 커지는 경우가 많다. 인간관계의 번뇌는 애증이 아니라 지속되는 부담에서 온다. 그래서 희망의 반대말은 절망이 아니라 자기만족이다. 희망을 가지면 다소 마음이 편하다. 덜 골치 아픈 삶, 생각하는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라디오를 듣다보면 프로그램은 달라도 다음과 같은 사연이 반복된다. 당대 사람들의 반성과 다짐이다. “저는 이제까지 ‘사는 대로 생각’해 왔어요. 앞으로는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 “하면 된다”는 새마을운동의 명줄은 언제 끊어지는가. 이 언설은 우리에게 굉장히 익숙하지만, 실제로 생각하는 대로 살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 우리가 상정한 상태(‘생각’)로 살고 싶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몸은 생각을 실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삶을 살아내는 주체다. 생각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일단, 생각 자체가 분명한 이도 드물다. 세상은 내 뜻대로 되지 않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의 뜻(사회적 구조)의 피억압자로 살아간다. 위정자들이라고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 생각은 바람이 아니라 현재 나의 행위를 중심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희망 달성을 위해 노력하기보다 산 대로 생각할 때, 삶은 위로와 사유의 수원이 된다. “새해 모든 이의 소망이 다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연말 즈음 또 하나의 재앙 담론이다. 건강, 돈, 취직, 국회의원 당선… 사람들의 소망은 비슷하다. 점입가경, 소망을 대의로 포장하는 사람도 있다. 세상이 지옥인 이유는 모든 이들이, 자기 소망을 동시 달성하려고 경쟁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의미 없는 대립이 계속된다. 바로 올해처럼.

    정희진,
    경향신문

    • sgg 184.***.163.142

      소위 언론인인자가 저따위글을 써서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무작위로 배포하니 큰일이다.

      • czber65 99.***.218.46

        병으로 약을 삼을만한 주변머리는 못가지신모양입니다.
        ^^

    • sgg 184.***.163.142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이 말은 맞는말이고 깊이 생각해볼말인건 맞지만, 정희진의 체념주의, 허무주의는 참 위험하네요. 우리가 항상 살면서 생각해야하는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even if”지요. 그게 생명의 속성이자 의무.

      • czber65 99.***.218.46

        허무주의라…흠…

        저는 오히려 정희진씨의 위의 글을 그녀 특유의 삶에 대한 강한의지로 해석했습니다.
        특히나,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다”라는 부분에서요. ^^

    • czber65 99.***.218.46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들은 사실상, 무언가를 엄청나게 욕망해보았고, 그것을 얻어도 보았고, 얻는데 실패도 해본 사람들이지요.
      그러한 혹독한 경험이후에, 무엇을 원한다는게, 욕망이라는것의 덧없음이 삶을 유지하는 것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저는 해석하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약한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걸으셨던 예수님이나, 무소유의 삶이라는 책을 썼던 법정스님같은 분들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예수님이나 법정스님은 결코 허무주의자들이 아니었습니다.

    • sgg 184.***.163.142

      왜 한국에 생활비가 없어 차라리 자살하는 가족들의 사건들이 생기는지 정희진은 언론인으로서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돈은 못도와줄망정 글로서라도 그 절망의 사람들에게 빛을 던져줄수있는 글에 대해 진짜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그정도 책임은 느껴야하지 않나? 세상의 모든 절망은 동일하지 않지만 세상의 모든 절망은 소망을 포기하지 않기위해 싸워야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게 자살하지 말아야하고 죽지말아야한다고 이야기하는게 아니라 삶의 종착역이 죽음이라 할지라도 그 죽음이나 절망을 대하는 우리 스피릿이 절망에 굴복하면 안된다는 의미이다. 절망은 창창한 십대들에게도 죽음에 이르게 하고 겉보기에 아무런 문제없는 4,50대들도 빛을 못보게하고 자살하게 하는 어두운 힘을 가지고있다. 사람이 희망을 찾고 빛이 있음을 알때 스스로 그의 태도도 변화하는것이고 살만한 가치도 찾아가는것이다. 삶의 가치와 소망은 자신이 찾아가야한다. 인간은 바위와같은 무생물이 아니라서 무형의 가치와 소망이 삶의 에너지가 되고 그걸 잃으면 한순간에 삶의 동력이 꺼져갈수 있는것이다. 우리가 얻는 삶의 동력은 음식물이나 돈이나 그런 유형적인 것만이 아니다.
      아인쉬타인은 이미 E=mc^2의 법칙으로 물질도 하나의 더큰 무형적 에너지의 카테고리에 포함됨을 이미 물리적 기본법칙으로 설파하였다. 우리의 포기하지 않는 스피릿이나 소망은 E에 해당하는 영역이다. 어찌보면 m에 속하는 돈이나 음식보다 더 중요할수 있다. 우주에 자유의지를 지니는 생명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신비하다.

    • sgg 184.***.163.142

      czbar님이 원글을 썼다는거 자체가 예수와 석가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것입니다.

    • sgg 184.***.163.142

      철학은 종종 이성을 혼동시키지요.

    • 개론 47.***.36.151

      이미 오래전 솔로몬 왕도 현실에 만족하고 즐기며 사는 게 최고라고 했고 인생 모든 게 다 부질없다고 했다. 허무주의? 논점을 파악 못하는 비뚤어진 마음의 소유자들은 그런 글들을 그렇게 간단히 잘못 해석해 버리고 욕을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 sgg 184.***.163.142

        정희진은 희망.소망을 헛된 욕정 욕망이라고 잘못된 정의를 하고 비판을 해나가며 희망 무용론을 주장하더니, 위에 얘는 솔로몬의 전도서를 잘못이해하고 남보고 잘못해석했다네? 어차피 거짓희망 거짓소망이 만연되어 있긴 하지.

        아름다움도 눈을 소유한자의 맘대로 보이는거고, 인생을 바라보는것도 마음을 가진 자의 맘따라 보이는것을…..어쩌겠나. 진주를 던져줘도 못알아보는 돼지에게는 일부러 진주를 알게 할 필요도 없어서 예수도 많은걸 해석없이 비유로만 말씀하신다고 하셨지..그래도 찾는자가 찾을것이요 구하는자가 구할것이라 하셨으니… 구하는자들은 희망을 잃지 말자.

    • kdsil 96.***.20.180

      하마터면 열심히 일할뻔 했다. 이말은 직장인들이 항상 반대로 생각하는 면이 있는 철학이 되겠지만 결론으로 말하자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 경우가 종종 생기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자살을 하든가 하는 비극이 생기는 것이다.

      너무 직장생활에서 기대를 하지 않고 사는 지혜도 필요하다.

      열심히 일해도 조직을 해체하거나 회사가 문을 닫거나 해고를 당하거나 하는 일상은 계속 반복됨을 이 사이트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이 다들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비롯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늘도 연극 무대의 엑스트라처럼 열심히 일해봐야 별로 표도 나지 않고 성과도 없음에도 열심히 일할것을 강요받으면서 살아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