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웨어 개발자들과 코로나 펜데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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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64.***.218.106 2433

    올해로 20년째 개발자로 현역에서 근무중입니다. 졸업후 첫 직장이 분수에 맞지 않게 잘나가는 초거대 소프트웨어 개발회사였고 그곳에서 8년을 근무하고 영주권을 받았습니다. 그후 여기저기 회사를 옮겨 다니면서 지금은 5번째 회사이고 총직원수가 20명 정도의 마이크로 규모의 전자회사에서 임베디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근무중입니다. 전공이 EE 가 아니라 CS로 학사 석사를 했기 때문에 첫직장은 그냥 순수 데스크탑 애플리케이션만 개발했는데 회사를 옮겨 다니다 직전 회사가 글로벌 전자회사라서 그곳에서 임베디드로 전향한거죠. 그리고 그회사서 4년간 임베디드 개발자로 경력을 쌓고 지금의 20명 직원의 마이크로 회사로 옮긴겁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에겐 이 회사로 옮긴것이 신의 한수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2년전에 이 회사로 옮길때 사람들이 저보고 미쳤다고 했었습니다. 글로벌 전자회사에서 잘나가다가 왜 가내수공업같은 회사로 가냐고… 근데 가고 싶었습니다. 그냥 이젠 저도 신입사원도 아니고 특별한 경력을 더 추가해야할 만큼 경력이 부족한것도 아니어서 그냥 옮겼죠. 그런데 지금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나서 저희 회사는 필수 업종으로 분류되어 여전히 잘 근무중이고 규모는 작고 상품도 몇가지 안되지만 글로벌 커스터머들을 상대하면서 나름 선방하고 있습니다. 직원들 모두 평소대로 출근하고 모든 작업이 정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매주 금요일마다 CEO가 직접 전직원 (20명) 을 회사 로딩닥에 모아놓고 1주일간 변화 상황에 대해 업데잇을 하는데 오늘도 사장은 우리 회사는 잘 버틸수 있으니 걱정 말라고 하더군요.

    역설적이게도 제가 직전에 다니던 초거대 전자 회사는 직원의 50%가 무급 휴직에 들어갔고 앞으로도 언제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갈지 모른다고 합니다. 사실 지난 2008년 경기 침체때도 엄청난 레이오프의 바람이 불었는데 그 당시에도 거대 기업들에서 직원들에 대한 레이오프가 많았고 오히려 소규모 가내수공업 같은 회사들은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죠. 이번에도 동일한 룰이 적용되는것을 봅니다. 몰론 100% 제말이 맞다라는건 아닙니다. 단지 개발자로서 커리어 체인지가 다른 업종에 비해 수월할 경우는 다른 직군들에 근무하는 사람들과 조금 다른 시각으로 커리어 패스를 정할수 있다라는 뜻입니다.

    저희 회사는 정말 가내 수공업같은 임베디드 전자회사고 개발자도 저 포함 단 2명뿐입니다. 테스트 인력도 없고 개발자가 개발도하고 테스트도하고 웹페이지 관리도하고 버그질라 괸리도하고 데이터베이스 관리도하고 가끔 커스터머한테 오는 전화도 받습니다. 마치 재래시장의 전통 닥집에서 생닥도 잡고 목도치고 뜨건물에 끓여내서 털뽑고 튀겨서 통닥으로 만들어 손님 테이블에 직접 들고가는 그런 1인 다역의 구조인거죠. 그런데 그런 회사들이 나름 잘 버티고 있습니다.

    데스크탑 애플리케이션과 임베디드 양쪽을 다 해본 저의 시각으로 볼때 개발 능력이 된다면 임베디드쪽이 훨씬 압도적으로 전망이 좋다고 봅니다. 제가 말하는 전망이란것은 단순하게 말해서 “안짤리고 쭉우 오래” 다닐 수 있는 그런 직장이란 뜻입니다. 작지만 확실한 기술을 가진 소규모 회사들일수록 직원수가 적고 그대신 각 직원들이 대체 불가능한 해당 분야 전문가의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잘 뽑지도 않지만 일단 뽑은 직원을 회사가 망하거나 본인 스스로 떠나지 않으면 끝까지 회사와 함께 갑니다. 개발자로서 20년째 근무를 해보니까 결국 남는건 401k 밸런스하고 통장에 저축해둔 쥐꼬리만한큼의 잔고…그리고 집한채 달랑 입니다. 무슨 신기술을 개발한다든가 최첨단 무기를 개발한다거나 우주 정거장을 조종하는 통제 프로그램을 만든다든가 그런게 아니고 그냥 하루하루 안짤리고 맡은일 은퇴할때까지 잘하는것이 가장 중요하더군요.

    이번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면 결국 언젠가는 정상으로 돌아가겠지만 이번일로 인해서 경제 구조가 어느정도 바뀌게 될것입니다. 마치 무분별하게 모기지 빌려서 큰집사고 큰차사고 큰비즈니스 사던 2008년 이전의 소비 패턴이 2008 이후 사라진것같은 의미인거죠. 개발자들도 이젠 빅4 같은 회사에 목을 멜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자신이 오래 살아 남을수 있는 직장을 우선 순위에 두는 시각의 전환이 필요할것입니다. 동네 한인 수퍼에서 박스를 까던 분들… 그동안 좀 무시당했지만 이렇게 모두가 잘려나가고 직장을 잃는 상황에선 그분들이야말로 가장 든든한 직장에서 근무하시는 분들이 된겁니다.

    • 지나가다 99.***.218.46

      인생만사(人生萬事) 새옹지마(塞翁之馬)

    • ㅠㅠ 74.***.150.96

      제가 다니는 회사랑 비슷한 느낌입니다. 전 이제 고작 직장 생활 3~4년차하고 있는 개발자입니다. 학사 마치고 3년정도 대기업 직장 다니다가 박사과정 입학했는데 너무 적성에 안 맞아서 석사만 받고 작년에 관두고 동네 작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영주권 처리가 늦게 되는 바람에 거의 쫄쫄 굶다가 첫 오퍼온 회사라서 수락하고 작년 말부터 다니고 있습니다. 제가 있는 회사도 개발자는 2명이고 온갖 잡다한 일을 다 처리합니다. 대기업에 있었으면 각각 다른 팀이 있어서 처리할 일인데 거의 혼자서 이 것 저 것 다 책임지고 하고 있습니다.

      한창 인터뷰 볼 당시에 오퍼 수락 후, 6~7개정도 인터뷰 보자고 요청 들어온 것들이 있었는데 재정상황이 너무 안 좋아서 돈 관계 없이 첫 오퍼와서 수락했는데 다행히 안 짤리고 다니고 있습니다. 회사 보스도 우린 줄일 것 다 줄였고 은행에서 론도 승인된 상태니까 잘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다른 지역에도 오피스 하나 있긴한데 두 오피스 합쳐봐야 50명정도 되는 회사입니다. 반면에 인터뷰 보자고 요청 왔던 큰회사들 지금 레이오프 했습니다. 물론 제 깜냥이 안 되기에 합격했다는 보장도 없지만, 혹시나 합격해서 다니다가 시기가 안 좋아서 레이오프 되었으면 어찌되었을까 생각하면 정말 아찔합니다. 그나저나 빨리 코로나가 진정되어서 다시 경기 회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절친 174.***.13.96

      잘 풀려서 다행이네요. 프로덕트 좋고 매출 탄탄하다면 작은 규모의 회사도 좋아요. 그러다가 회사가 갑자기 팔리거나, 오너가 리타이어 하면서 흐지브지 되기도 합니다만, 그러면 또 갈아타는거죠.

    • vb 76.***.0.134

      공감합니다. 저도 가늘고 길게 보는 입장이라… 저희 회사는 제조업으로 90주년 지났습니다. 이전에 오일 개스 드릴링 회사 다닐때 기름값 폭락시 바로 레이오프 되었는데 여기는 나름 필수직종이고 90년 버텼고 게다가 서브프라임때도 건재했다고 합니다. 5학년도 되고 하다 보니 여기가 공무원이네 하는 생각으로 남들한테 화려하게 자랑할 건 없지만 “그나마” 안정적인 것 보고 다닙니다. 지금은 한달째 working from home 하는데 회사 매출도 현재 탄탄하다 합니다. 참 저희 IT 멤버도 6명 입니다. 그중 한명 매니저, 한명 시스템.

      젊은 사람들 이것 저것 경험 쌓아야 겠지만 말씀하신대로 나중되면 얼마나 길게 가느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 asdfdsf 96.***.218.119

      개인적으로는 의미있지만, 돈은 전혀 안되는 일을 하다가 몇년전에 개발자로 전직했습니다. 어느덧 적은 나이가 아니게 되어 버렸네요.

      나이랑 상관없이 개발 경력으로 따지면 학부졸업해서 몇년정도 된 친구들과 별 차이가 없다보니, 생각하는 방식도 그들이랑 비슷한 듯 합니다. 아직은 철밥통이지만 덜 재미있는 일을 하기보다는 이것 저것 다양하게 경험해보고 싶네요. 내년 쯤에는 소위 말하는 Big4도 한번 시도해보려고 틈틈이 준비중입니다.

      굵게 도전정신으로 사는 것도 좋고,
      안정적으로 오래가는 것도 좋고,

      사람 취향따라 다르지만, 그래도 미국은 적어도 IT related job들에는 기회가 많아서 꿈이라도 꿀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미국 생활의 수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한국같았으면 닭튀길 기계보러 다니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 한국미국 122.***.176.131

      경험이 담겨 있는 좋은 글이네요.

      꼭 임배디드 등의 직종, 직군보다는
      회사 몸집이 커지면 군살이 많아지는 것이 당연한 듯 합니다.
      반면 중소업체들은 살아남기 위해 평소에도 날렵한 몸을 유지하고 있지요.

      어려울 때는 군살을 많이 빼야 하는 것이 이치입니다.

    • 한국미국 122.***.176.131

      그리고 나이가 젊고 혈기 왕성할 때는 굵은 진로가 좋아 보입니다.
      이해는 됩니다. 도전정신을 살려서 경쟁을 하는데 젊음을 불살라야 할 때가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나이가 들어 힘이 빠지면 길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더구나 가족까지 생기게 되면 직업 안정성 만큼 중요한 것이 없지요.

    • 73.***.79.2

      글의 요지와 상관없는 딴 얘기지만… 직원이 대체불가능하다는건
      회사입장에서 lean하게 운영된다는 얘기도 되지만 핵심직원이 떠나면 risk가 크다는 얘기도 될거고…
      직원입장에선 몇달간 쉬고 싶거나 다른 포지션으로 옮겨가기 힘들단 얘기도 될거고…

      회사구조나 특정테크분야에 의존해서 쭉 가야한다는게… 잘 모르겠어요. 경력 쌓이면서 보니 아무나 쉽게 뛰어드는 분야 우르르 따라가는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다고 한분야에 올인하기도 좀 그렇던데요.

      방금 든 생각은 점점 IT쪽 진입장벽이 낮아지고 나중엔 software engineer한 명이 coding도 하고, cloud infra도 만들고, machine learning까지하는 그런 시대가 오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