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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불편을 모르고 살던
가난 가난 가난한 가난의시절에가장 절박했던 건
세 끼의 식사
였다.
우리의 소원이라고 불리우라던
통일,
그 통일보다도 훨씬 앞선 소원이야말로
세 끼의 식사
였다.
지금도 그 후유증은 남아
풀뿌리 민주주의
란 말을 들을 때마다
언덕배기에 내렸던 풀뿌릴 캐어
곰곰이 되씹으며
단즙을 채굴했었던 기억이 떠올라풀뿌리 민주주의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다.
민주주읠 안 좋아 하는 게 아니라
풀뿌리란 단어가 들어가 안 좋아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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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우리와 함께 가야만 하는,삶의 자연스런 동반자쯤으로 여겼었기에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다
는 생각은
가난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아주아주 불순한 생각였기에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고게 행복한 거다로 여겼던 그 때가
절대로 지금보다
불행했다고는 단정할 수 없지만끼니걱정
을 해야만 했었던 건
안 불행이라곤 말할 수 없을 것 같다.그래서 빌고 빌었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일용할 양식,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참고로,
여기서 우리 아버지람
요단강을 건너신 우리 아버짐.형제들 중
유독 잘생기고
학교에선 전교1등만 하고
부모님말씀에 순종만 하는 효자였던,형만한 아우가 있단 걸 보여 준 날
무척이나 어여삐 여기셨던 우리 아버진
역쉬 사나이답게 의리를 배반하지 않으셨고내 기돌 들어
일용할 양식,
일용할 양식,
일용할 양식을 내려주셨는데,
그 양식이 바로
결혼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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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땐 다들 그런 말에 익숙했었다.먹고나면 배고프고
먹고 돌아서면 배고프다.마눌도
초가삼간에서 잔뼈가 굵어선지
통일보다 한 발 앞선 소원이세 끼의 식산지라
종종 그랬었다.
“그냥 잘거야?”
해 우리 부분
소원의 목푠
게 공통점이라서세 끼의 식사
를 하고도
꼭꼭
밤참,
밤참,
밤참을 먹거위해
곧잘 의기투합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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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없던 적 모르는 깨구락지처럼끼니 걱정 없이
배때지가 불러오자일식일찬
에 대한 불평불만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것도 우리 부분 닮아
난,
일식일찬이 물려 안 먹다가
불륜, 간통, 내연, 원조교제, 뚝넘어니의 메뉴들로
입맛을 살려갔는데마눌은,
거울 앞에 머무는 시간이 늘고
헬스클럽이니
등산이니
동창이니
베드민턴이니의 모임에 빠짐없이 나가면서집밥
을 외면했었는데
뭘로 끼닐 채웠는진
아직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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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 잡숫고 나니
자동으로소식
가가 되어버린다.
통 뭘 먹고 싶다는 생각이 생각해 지질 않는다.
나일 먹으면 그래진다더니
나도 이젠 잡술만큼 잡숴선지추억
만을 먹고 살게 되는데
마눌도 따라 주 메뉴가
추억
이 되어선지
잘나가던 호시절의 나를 생각하며
무슨 술 써서라도
날 기필고신혼초 때의
먹성 풍성하고 왕성한 나
로 돌려놓고야 말겠다며
마늘이니 부추니 호두니 뱀장어꼬리니
물개의 그 다리니로
밥상머릴 둘러치며
가운데엔
추억찜을 푸짐하게 올려 놓지만게 다 허산 게,
그러고 있는 마눌의
풀죽어 납작해진 궁뎅이를 보고 있노라면추억은 고사하고
입맛까지 홀딱 달아나
몇 술 뜰 것도 안 뜨게 되니마눌이나 나나의 밥상머린
언제나 고요와 적막,
푸석푸석함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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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슨
나라를 구해보겠다고 국회로 가
삭발하고 단식을 하는 것도 아닌데요즘은
일식은 고사하고
주식은 언감생심
월식이라도 제대로 좀 먹어봤음 싶은데
년식도 어려울 것 같아이러단
마눌이나 나나
굶어죽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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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되겠다.일라그라 두 개 삼
함만스그라 한 개가 프리란 쎄일 광고다.너와 너.
나와 다르지 않을 너희들이
새벽부터 줄서선 아도치기전에
나도 일찍 서둘러야겠다.더군다나
“조기에 품절될 수 있습니다.”
졸라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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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어쩌다 이리되었는지……
아!!!
끼니걱정해야하는 노훈 역쉬
초라하고 비참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