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지붕부터 지을 수 있는 집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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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roica 50.***.41.131 2637

    Christe Redemptor – Boys Air Cho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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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지붕부터 지을 수 있는 집은 없습니다

    나와 같이 징역살이한 노인 목수 한 분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그 노인이 내게 무얼 설명하면서 땅바닥에 집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에서 내가 받은 충격은 잊을 수 없습니다. 집을 그리는 순서가 판이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붕부터 그리는 우리들의 순서와는 거꾸로였습니다. 먼저 주춧돌을 그린 다음 기둥, 도리, 들보, 서까래, 지붕의 순서로 그렸습니다. 그가 집을 그리는 순서는 집을 짓는 순서였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그림이었습니다. 세상에 지붕부터 지을 수 있는 집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지붕부터 그려 온 나의 무심함이 부끄러웠습니다. 나의 서가(書架)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낭패감이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책을 읽다가 ‘건축”이라는 단어를 만나면 한동안 그 노인의 얼굴을 상기합니다(신영복, <나무야 나무야>, 돌베개, 90쪽).

    ‘일’ 곧 노동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입니다. 물론 육체노동에도 정신적인 측면이 있고 정신노동에도 어느 정도는 육체적인 측면이 따르지만,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우리 사회에서는 육체노동을 정신노동보다 천하게 여겨 왔습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식이 육체노동보다는 정신노동 분야에 종사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입시 열풍이 몰아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어떻게든 대학 졸업장 정도는 따야 육체노동보다는 덜 힘들면서도 대접은 더 받는 정신노동 분야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풍토 때문입니다. 육체노동에 대한 대우가 예전보다는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사실 아직도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사이에는 임금과 사회적 인식 등에 있어서 꽤 차이가 존재합니다. 아마 열 명의 여성들 가운데 아홉은 배우자로 말쑥한 차림의 정신 노동자를 선택하기 원할 것입니다.

    영어에서는 육체 노동자와 정신 노동자를 각기 블루칼라(blue color)와 화이트칼라(white color)로 표현합니다. 매우 암시적인 표현입니다. ‘블루’ 하면 청바지 작업복이 연상됩니다. 반면에 ‘화이트’ 하면 하얀 와이셔츠가 연상됩니다. 땀방울, 기름방울로 얼룩져도 그만인 청바지와 혹시 볼펜 자국이라도 가지 않을까 조심하게 되는 하얀 와이셔츠, 구릿빛으로 검게 그을린 육체 노동자의 얼굴과 말쑥하다 못해 창백한 느낌마저 드는 정신 노동자의 얼굴, 이 둘 중에 여러분은 어떤 쪽이 더 마음에 드십니까? 여러분은 후일 여러분의 자녀가 이 둘 중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까?

    구체적인 삶의 현장은 잘 모르는 채 책상머리에 앉아 머리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따지고 연구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먹물’이라고 부릅니다. 먹물의 사전적 정의는 ‘먹을 벼루에 갈아서 만든 물’입니다. 먹이나 벼루는 글을 쓰기 위한 것입니다. 글은 거의 배운 사람들의 전유물입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우리나라에서는 글(학문, 지식)을 독점한 사람들이 지배 계급으로서 권력 또한 독점해 왔습니다. 예전보다야 덜 하겠지만, 오늘날에도 이 ‘먹물’들이 우리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막강한 지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요직 개편이 있을 때마다 신문에서 늘 확인하는 바이지만, 소위 일류 대학 일류 학과를 나온 사람들이 정부의 주요 공직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우리 사회에 누적된 엄청난 문제들과 이런 현상 사이에 혹시 깊은 관련이 있다고는 여겨지지 않습니까? 땀에 전 육체노동의 소중함을 잘 모르는 사람들, 구체적인 삶의 현장의 구체적인 사람들의 구체적인 요구를 정확히 인식하려고 애쓰기보다는 ‘머리’나 논리나 이론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사람들, ‘따뜻한 가슴’보다는 ‘냉철한 이성'”을 내세우는 사람들, 소위 ‘먹물 근성’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소수의 창백한 지식인들이 이 나라의 정치와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노동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생산직 노동자 출신이 노동부 장관이 되면 이 나라의 경제가 완전히 거덜 나고 말 것이라는 걱정이 드십니까?

    이 시대의 양심적 지식인을 대변하는 신영복 선생은 ‘한 노인 목수’에게서 받은 ‘충격’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지붕부터 그리는 우리들의 순서와는 거꾸로’ ‘먼저 주춧돌을 그린 다음 기둥, 도리, 들보, 서까래, 지붕의 순서로’ 그림을 그리는 목수의 모습에서 ‘나의 서가(書架)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낭패감’을 맛보았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일하는 사람의 그림’ 하나가 그에게 번쩍 계시의 빛으로 다가와 오랜 세월의 학문과 사색을 통해 쌓아 올린 높은 지식의 탑을 순식간에 날려 버린 것입니다.

    그의 ‘서가’를, 그 드높은 지식의 탑을, 지식의 바벨탑을 무너뜨린 것은 어느 누군가의 더욱빼어나고 탁월한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난해한 이론이 아니었습니다. 복잡하고 정교하고 고도로 세련된 논리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한평생을 집 짓는 일을 해서 자식을 키웠을 한 ‘노인 목수’, 전문적인 건축 이론은 접해 보지도 못했을 무식한 목수, 그렇지만 ‘지붕부터 지을 수 있는 집’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일하는 사람’, ‘집을 짓는 순서’를 몸으로 알고 있는 사람, 그의 지극히 당연한 상식, 평범한 삶의 ‘지혜’였습니다.

    목수는 ‘집을 짓는 순서’를 알고 있습니다. ‘주춧돌’이 제대로 서야 집의 나머지 부분도 튼튼히 설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몸으로 압니다. 이 단순한 ‘몸의 지혜’, 노동의 지혜, 삶의 지혜 앞에서 복잡한 ‘머리의 지식’은 일거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예수의 아버지 요셉이 목수였다는 사실, 그리고 예수 자신도 목수였다는 사실은 올바른 예수 이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아마도 예수는 철이 들면서부터 목수의 일, 그러니까 힘겨운 육체노동에 종사했을 것입니다. 이런저런 가구도 만들고 집도 숱하게 지었을 것입니다. 예수의 공생애가 서른 살가량 되어 시작되었으니 적어도 예수는 15년 이상을 땀에 절고 뜨거운 햇볕에 몸을 그을리는 육체 노동자로 생활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공식적인 교육은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세상살이나 인간이나 역사를 ‘노동’ 내지 노동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청년 예수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겁니다.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 5:17).”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 15:1).” 예수의 말씀입니다. 예수는 하느님 아버지를 ‘일’하는 분, ‘농부’로 고백합니다. 하느님은 곧 노동자 하느님이요 농부 하느님이라는 고백이 아닙니까? 예수의 머릿속에서 하느님은 하늘 저편에 가만히 앉아 계신 초월적인 하느님, 자신은 몸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이 땅의 사람들에게 이래라저래라 지시하는 독재자 하느님, 인간의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뭔가 신비한 방법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는 불가사의한 하느님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큰물이 밀려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쳐도 그 집은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마 7:24~25).” 이 말씀에도 목수로서 잔뼈가 굵은 청년 예수의 육체 노동자로서의 자의식이 담겨 있다고 봅니다. 기초가 튼튼한 집은 홍수가 나고 강풍이 몰아쳐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예수는 몸으로 깨닫고 있었고, 이 삶의 지혜가 공생애 이후의 하느님나라 운동에서 실천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청년 예수는 풍부한 노동 경험에 기초해서 갈릴리의 어부나 농부나 노동자들에게 자신 있게 접근할 수 있었고, 바로 이 공통의 노동 체험으로써 그들의 아픔과 희망을 정확히 포착할 수 있었던 겁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 11:28).” 이 말씀의 청중이 누구였을까요? 뼈 빠지게 농사짓고 품을 팔아도 이리저리 다 빼앗겨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사람들, 노동의 대가를 착취당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요. 이 말씀으로써 청년 예수는 그들에게 농민 해방 노동 해방의 아름다운 세상, 일할 때는 땀 흘려 열심히 일하고 쉴 때는 ‘편히’ 쉴 수 있는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자고 외친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렇듯 ‘노동’의 눈으로 보면 복음서는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섭니다. 이 노동의 눈(관점)은 교리나 신학의 색안경을 쓰고 복음서를 읽을 때와는 판이한 예수 운동의 모습을 우리에게 펼쳐 보입니다. 바로 말해 청년 예수가 선포하는 복음은 ‘일(노동)’하는 사람들을 위한 복음이지 일하지 않고 남의 노동의 결과물을 가로채 먹고사는 얌체들을 위한 복음이 결코 될 수 없습니다.

    그대는 지금 어떤 일(노동)을 하고 있습니까? 그 일을 통해 세상살이의 참다운 지혜를 깨우쳐 가고 있습니까? 혹시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외면한 채 먹물 근성만 쌓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대를 가슴앓이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책상머리의 창백한 지식입니까? 이 땅의 농부나 노동자나 서민들, 힘써 일하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는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삶의 현실입니까? 그대는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아픔에 가슴이 저립니까? 혹시 말로만 머리로만 그들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대는 삶의 ‘주춧돌’을 튼튼히 쌓고 있습니까? ‘따뜻한 가슴’과 ‘냉철한 이성’과 신앙과 양심과 역사 발전의 신념을 차근차근 다지고 있습니까? 뭔가 붕 뜬 채 하루하루 허송세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