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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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디장 68.***.30.210 5300

    새해를 맞으며 기대하고 계획하는 일들이 많지만 지나간 일들을 아쉬워하게 된다. 얼마전 한 작가가 옛 것은 잊어야 하나라는 질문을 던지며 돌아가신 아버지가 애용하던 향수를 찾아 헤맨 이야기를 적은 기사를 보았다. 망각은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하지만 옛 것이라고 다 보내고 다 잊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간혹 가다 옛 사람 옛 것을 추억하며 센티멘탈할 수 있는 순간도 있어 인생이 더 풍요해 지는 것 같다.

    아버지의 마지막 생신에 아버지가 과거 애용하시던, 더 이상 팔지 않는 향수를 드리고자 각방으로 노력하다 결국 찾지 못했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찾게 되어 그 향기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새삼 발견했다는 글을 보며 떠오른 것은 모리츠 (Moritz) 라는 식당이다.

    이 식당은 내 대학 시절의 추억이 많이 담겨 있는 곳이다. 대학가 콘도 빌딩 1층에 있는 식당이었는데 로컬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돌아가면서 전시하고 한 켠에서는 누군가 늘 기타를 치며 노래를 했는데 비틀즈 노래를 많이 연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떤 음식이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당시 외식 경험이 별로 없던 나에게는 그 식당에 가는 것이 마치 세상에서 가장 고급스럽고 우아한 곳에 가는 것 같은 행복감을 주었었다.

    이 식당을 내게 처음 소개해준 사람은 애칭이 디디 (Dee Dee) 라는 대학 선배였다. 고등학교 여름 방학때 불어 연수를 갔다가 만난 몇살위의 멋쟁이였는데, 사교적으로 서투른 내가 안 되어 보였는지 친 언니처럼 보살펴 주었었다. 나중에 내가 본인이 다니는 대학에 지망하게 된 것을 알고 대학 방문을 갔을때 이 모리츠라는 식당에서 저녁을 사주었었다.

    디디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멈추고 돌아볼 만한 미인이었는데다 머리도 아주 좋아 나는 늘 그녀에게 감탄했었다.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것 같은 디디가 좋아하고 소개해준 식당이라 모리츠는 내게 특별한 곳이 되었던 것 같다.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은 디디는 사실 근육이 후퇴하는 불치병을 앓고 있었다. 유전병이라 친척중 두명이 그 병으로 죽었고 본인도 휴학을 하기도 하고 물리 치료등을 받으며 늘 병과 싸우고 있었다. 당장 몇년안에 죽을 병은 아니었지만 언제 악화될 지 몰라 미래를 계획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디디는 그런 중에도 늘 무엇인가 내게 베풀어 주고 새로운 경험을 주려고 했는데 나는 아직 사회 물정이나 대인 관계에 대한 경험이 부족해 고마워 하면서도 감사의 표현조차 제대로 못했었다. 오히려 그녀에게 짐이 되었던 적이 많은 것 같다.

    디디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녀의 결혼식이었다. 의대생과 사귀고 있었는데 건강때문에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으려고 하다 결혼에 이르렀고 다른 도시로 이사간 후 아이를 낳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기적적으로 아이를 낳았다는 카드까지 받았었다. 이후 서로 이사를 거듭하다 연락처를 잃게 되고 그녀의 소식도 끊겼다. 그녀를 찾아 보려고 의사 디렉토리로 남편이름을 찾아 보기도 했는데 연락처를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대학을 다시 방문할 일이 있을때 마다 찾아 가던 모리츠 또한 어느날 연락해 보니 문을 닫았다.

    대학 시절의 추억을 되살려주던 모리츠에 대한 아쉬움보다 더 큰 것은 디디 처럼 내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었던 이들에게 진 사랑의 빚을 더 이상 갚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개중에는 아직도 연락이 되고 감사의 표현을 할 수 있는 이들도 있지만 너무 많은 이들과 찾아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세월이 가면서 사랑의 빚의 무게도 더 늘고 있다. 억울했던 일을 해결하지 못한 마음의 분은 시간이 가면 잊혀 지는데 사랑을 받고 미처 보답하지 못한 미안함은 시간이 갈수록 커진다. 그분들을 찾아 볼 수 있는 확률이, 이제 와서 제대로 감사를 표현할 만한 방법을 찾을 확률이 점점 더 줄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올 겨울에는 감사한 분들에게 더 늦기 전에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또 새해에는 직접 갚지 못한 사랑의 빚을 간접적으로 라도 갚을 수 있는 길을 찾아 보고자 한다. 그래야 디디를 추억할 때 미안함 보다 고마움이 더 클 것 같다.

    Copyright© Judy J. Chang, Esq. All rights reserved. 기사에 대한 의견은 글쓴이에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쥬디 장 변호사, J Global Law Group. T: 650-856-2500; http://www.jgloballaw.com)

    • 한라산 75.***.84.93

      장변호사님,

      언제나 깔끔한 글로 이민환경에 지친 우리들을 감동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번 글도 퍽 인상적이어서 주위 사람들에게 돌려 익힐까 합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 Donghee 76.***.162.43

      이미 갚아가시고 계시다고 생각됩니다. 다른 변호사에게서 안 되는 case 로 판정받고 ( part time H1b) 밤잠을 못 이루었는데, 첫 번째 통화부터 마지막 승인 통보 전화까지, 정말 감동의 연속이었읍니다. 수 많은 case 를 다루시는지 잘 알지만, 마치 제 case 하나만 하시고 계시는 듯이 생각되게 일 해 주시는 분, 정말 감사드립니다. – 시애틀에서..

    • 찬사를 98.***.151.127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댓글이 본문 만큼이나 감동적입니다.
      “수 많은 case 를 다루시는지 잘 알지만, 마치 제 case 하나만 하시고 계시는 듯이 생각되게 일 해 주시는 분”

    • 주희아빠 64.***.255.40

      변호사님 글주제로 의외의 제목이라 궁금해 들어와 보았습니다.답글도 참 인상적이네요.이렇게 성심껏 해주시는 변호사님이라니 감사하다는 생각이듭니다.

      전 몇년전에 EB2로 영주권을 받았지만 그동안 대부분의 이기적이고 애간장타게 하는 이민변호사와 한명의 인상적인 한국인아닌 변호사를 만났었습니다. 미국에 살기로 하고 터전을 미국에 두고있는 가족으로서 비자때문에 어려운 상황이 많은데 많은 이민변호사가 돈이외엔 안보이는 사람이 참많다는 것을 느꼈었습니다. 오해가 있을수 있어서 제가 만났던 그 한명의 변호사는 밝히지 않겠지만 답글을 보이 장변호사님도 따스한 하트를 가지신 변호사님 같네요.

      감사합니다.

    • 딴따라 71.***.105.72

      저도 이민, 법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한 우물밖에 모르는 사람인데, 주디 변호사님 만나서, 도움 많이 받고 있습니다.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소리 낭랑한 여자 매니저 크리스씨의 친절한 대답에도 늘 감사 하게 생각하구요. 변호사때문에 고민하시는 분들 애환을 잘 이해 못하는 것이 운좋게 처음 부터 주디 변호사님의 도움을 받아서 그런것 같다는 생각 늘 합니다. 어차피 제가 선택한 인생이니, 동결이니, 뭐니 귀막고 계속 한우물만 파고 있는게 나을것 같다는 생각 최근에 했습니다. 그러면 언젠가 무슨 소식 나오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