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진회 73.***.134.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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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구(李容九, 1868년 양력 2월 14일(음력 1월 21일) 경상북도 상주 ~ 1912년 양력 5월 22일)는 대한제국 말기에 일진회 회장을 지내며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찬성 여론을 이끌었다. 자는 대유(大有), 호는 해산(海山)이다.

      생애:
      1868년 경상북도 상주군 진두리에서 태어나 19세에 청주로, 20세에 충주군 황산리로 이주하였다.[1] 23세 때 동학당에 입교, 2대 교주 최시형에게 배워서 손병희와 함께 고제(高弟)가 되었다. 1894년 동학혁명 후 교주 등이 잡혀 처형될 무렵 항일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1] 함께 투옥되었으나 곧 사면되었다.

      1901년 3월 손병희, 손병흠과 함께 대한제국에서 펼쳐진 동학 탄압으로 말미암아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손병희의 명교(命敎)를 받고 귀국하여 포교 활동에 종사하다가,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1904년 9월에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여 주관하였다.[2] 1904년 송병준의 권고로 일진회와 합쳤다.

      러일 전쟁 때 일본군에 적극 협조하고 1905년 손병희가 동학의 전통을 이어 반일 사상을 가진 천도교를 포교하자 이에 맞서 친일 사상을 가진 시천교(侍天敎)를 창설, 교주가 되었다. 일진회 총위원장, 회장이 되어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자 흑룡회 주간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의 연줄로 친일 활동을 재개하였으며, 국민들에게 한일 합방을 제창하는 동시에 고종, 총리대신 이완용, 소네 아라스케 통감 등에게 한일합방 건의서를 올리는 등 친일활동을 하였다.

      1909년 11월 4일 이토 히로부미 장례식 날 서대문 밖 독립관에서 일진회 회원들을 거느리고 이토 추도회를 열었다.[3] 전 독립협회 회원이자 일진회 총무이며, 일진회 기관지인 국민신문사 사장이었던 한석진이 조문을 낭독했다. 그해 12월 한일합병 청원에 앞서 일본 수상 가쓰라 다로(桂 太郎)에게 청원 소요자금 3백만 엔을 상의하자 가쓰라는 3천만 엔이라도 제공하겠다고 답하였다. 그러나 일진회원 25만 명에게 제공된 돈은 불과 15만 엔이었고, 일진회는 한일합병과 함께 1주일의 시한을 두고 해산 권고를 받게 된다.[1]

      1912년 5월 22일 은거하던 일본 스마(須磨)에서 죽기 얼마 전에 문병차 왔던 우치다 료헤이에게 “우리는 참 바보짓을 했어요. 혹시 처음부터 속았던 것은 아닐까요?”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1] 사망한 뒤 일왕으로부터 훈1등 서보장(瑞寶章)을 받았다.[4]

    • 송병준 73.***.134.131

      송병준(宋秉畯, 일본어: 野田 秉畯 のだ へいしゅん 노다 헤이슌[*], 개명전 일본어: 野田 平次郎 のだ へいじろう 노다 헤이지로[*][2], 1857년 10월 7일(음력 8월 20일) ~ 1925년 2월 1일)은 조선 말기에 활동한 무관 정치인으로, 정미칠적 중 한 사람이며 한일 합병 조약 체결 과정에서도 일진회를 통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무과 급제 후 무관으로 활동하다가 김옥균을 암살 밀명을 받고 일본에 건너갔지만 오히려 김옥균에게 감화되었고 그의 동지가 되면서 개화파 정치인이 되었다.[3] 그러나 뒤에 친일파로 변절하여 일진회 등의 조직과 한일신협약 체결, 한일 합방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오늘날 그는 이완용과 함께 친일파, 매국노의 수괴로 대표되는 인물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창씨한 사람 제1호였으며 그의 별명 또한 ‘노다(野田) 대감’이었다.[4] 그 는 조선 말기 무관이자 정치인 이며 호는 제암(濟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