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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어머니와 영주권’이라고 써 놓고 보니 ‘어머니와 고등어’라는 김창환씨 노래가 생각나네요. 첫줄부터 삼천포로 빠지면 안되니까 다시 맘을 다 잡고 원 주제로 돌아갑니다. 이틀후면 어버이 날입니다. 많은 분들이 고국에 계신 부모님께 안부 전화도 드리고 꽃이나 선물을 주문해 배달시키고 하시겠지요. 해외에 나와 살아서 힘든 일 중 하나가 나이 드신 부모님을 자주 뵐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더 우리 마음을 힘들게 하는 것은 갑작스레 부모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지요.
설마 나한테 그런 일이..생길까 하고 살았었는데, 몇 해전 가슴 아프게 어머니를 떠나 보내 드렸습니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지나 괜찮아졌지만 어머니 돌아가시고 한두 해 동안은 어머니가 보고 싶어 많이 힘들었습니다. 엄마와 딸사이는 원래 각별한 법인데, 저희 엄마와 저 사이는 유달리 각별 했었거든요.
제가 첫 아이를 낳고 엄마가 미국에 오셔서 제가 일하는 동안 아이를 돌봐주셨습니다. 저야 그 동안 뵙지 못해서 그리웠던 엄마랑 함께 살게되니 더 할나위 없이 좋았지만 하루 종일 아이와 단둘이서 보내셔야 했던 엄마는 팔자에 없는 감옥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래도 자식사랑에 늘 뭐 먹고 싶은 것 없냐고 챙겨 주시기 바쁘셨습니다. 갓 태어난 사랑하는 딸과 사랑하는 엄마와 함께 지내며 매일 매일 많이 행복 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엄마께서 식도에 뭐가 막힌 것 같다고 하셔서 병원에 모시고 갔었습니다. 보험환자가 아니라 바로 의사진찰 후 내시경 검사를 할수 있었는데, 며칠 후 병원에서 위암이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점심시간 후에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고 퇴근 할때까지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급히 한국에 돌아가셔서 수술을 받으셨고, 수술 경과가 괜찮다고 해서 마음이 조금 놓였습니다. 그때 저는 영주권 수속을 하고 있었는데, 빨리 영주권이 나와 한시바삐 엄마 곁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냥 직장이고 영주권이고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갈까 고민 많이 했습니다. 엄마는 제가 미국생활을 접고 돌아오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여자도 자신의 일을 갖고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일구어 나가야 한다고 가르쳐 오신 엄마셨기에
당신 때문에 제가 꿈을 접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엄마라고 왜 저를 곁에 두고 싶지 않으셨겠습니까..엄마를 뵈러 휴가를 내서 한국에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의 2주가 금방 지나고 작별 인사를 드리는데, 현관 문을 잡고 ‘우리 딸 이제 보면 언제 또 보나…’ 하시며 눈시울을 붉히셨습니다. ‘금방 또 볼텐데 뭘..’ 씩씩한척 돌아섰지만 그 말씀이 오래도록 가슴에 걸려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간절한 바램 덕분인지 140이 생각보다 빨리 승인되었습니다. 바로 CP 진행을 시작했습니다. 당시는 CP로 진행하면 6개월이면 영주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미 대사관에서 인터뷰 날자가 잡히고 두달이면 엄마도 다시 뵙고 영주권도 받는 구나하는 생각에 하루 하루가 빨리 지나가길 바랬었는데…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별로 상태가 좋지 않으시다는 의사말에 식구들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회사에 long term leave 처리를 하고 부랴부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슬픈 마음 구석에는 그래도 이제 엄마를 곧 뵐수 있다는 작은 설렘이 있었습니다. 집에 와서 짐 풀어 놓고 바로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혼수상태에 빠지셨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렇게 그리워하던 엄마를 이제 막 뵈려는데, 하늘이 너무 원망 스러웠고 더 빨리 오지 못한 제 자신이 너무 미웠습니다. 이런 일은 드라마에나 나오는 줄 알았는데…
제가 온다고 좋아하시던 엄마는 주무시듯 병실에 누워계셨습니다. 담당의사로부터 깨어나시기 어렵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루만 아니 반나절만 일찍 왔어도 엄마를 만나 뵐수 있었는데 하는 후회가 가슴을 아프게 때렸습니다. 그 날 저녁 가족들과 함께 엄마 침상을 지키는데, 엄마 팔다리가 조금씩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어렵게 아주 어렵게 한쪽 눈을 뜨셨습니다. 순간 엄마가 혼신의 힘을 다하고 계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엄마 손을 잡고 열심히 잘 살겠다고 엄마 너무 사랑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몇분 되지 않아 다시 눈을 감으시고 영영 깨어나시지 못했지만 그래도 내가 온걸 엄마가 알아줘서, 그리고 엄마한테 작별인사 할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 했습니다.
두달 후 순조롭게 영주권을 받았습니다. 엄마가 보고 싶은 날에는 가끔 ‘내가 엄마와 함께 보낼수 있었던 그 얼마 안되는 시간을 영주권과 바꾼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빨리 가실 줄 알았으면, 한국으로 돌아가서 엄마와 함께 지낼 것을 하는 후회도 듭니다.
엄마생전에 사랑한다는 말 자주 드렸었는데, 돌아가시고 나서 그나마 그 것이 마음의 위로가 되었습니다. 아프신 후로는 매일 전화 통화하면서 사랑한다고 말씀 드렸었거든요.
여러분도 얼른 수화기를 드시고 부모님께 뜬금(?) 없는 사랑고백을 드려보세요. 좋아하실 거예요. 이 세상 어떤 선물 보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