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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동료들중엔 퍼스트 네임이 같은 동료가 두명있다. 그 이름은 브래드.
업무이유로 급하게 확인할게 있을때, 브래드를 호명하면 둘이 동시에 그들의 큐빅클 위로 머리를 쑥내밀어 나를 쳐다볼때가 종종 있다. 이러는 와중에 나는 가끔 실수를 한다. This time, old Brad, please.
올드 브래드는 곧 70대를 바라보는 엔지니어고 다른 브래드는 20대 중반이다.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언제나 차별감에 민감해 보이는 흑인 엔지니어 죠수아는 늘 나에게 경고한다 (얘는 30대 중반). “너 지금 나이 차별 하고 있어!” 그는 심지어 충고까지 한다. 차라리 60대 브래드라 호칭하는게 났다고. 하지만, 이내 나이숫자를 호명하는 것 또한 나이차별이란다. 미국사회에서 과연 차별아닌것은 어떤것이 있을까 내 스스로에게 조용히 되물어 본다. 미국이민 온지 수십년이 되었어도, 내 몸이 한국인 정서를 기억하고 있어서 그런지, 나는 나이차별, 성차별같은거를 나도 모르게 여전히 저지르고 있는게 분명한것 같다. 시인 서정주식 대로, 나를 만든건 8할이 빌어먹을 한국문화였으니까 말이다. (오해 마시라, 나는 미국문화도 자주 빌어먹을 미국문화라고 부른다)
나는 올드 브래드보다는 어리지만, 이미 머리가 하얗게 백발이 된 나이이다 (하지만, 염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직장에서 나이차별을 느껴본 적은 없다. 아니, 직장에서 업무활동중에 내 나이를 의식하게 만드는 상황을 느껴본적이 없다고 표현하는것이 보다 더 정확하다. 따라서 미국이민온지 수십년이 되었지만, 나이차별은 이곳 게시판같은 한국사람들만의 온라인 공간이 훨씬 심해 보인다는 것이다. 한국인 나이차별주의자들은 내 글에서 냄새가 날뿐만 아니라, 틀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내 글이 만약 자신들의 정치적 성향과 달라보이면 무조건 욕질을 하곤 한다. 이들은 스스로 젋다는 것이 진실만을 주장할 수 있는 자격인양 행세하곤한다. 하긴, 나도 젋었을땐 저 정도는 아니였지만, 완전하게 저런측면이 없었다고 자신하기에는 수월치가 않다.
나는 한국 직장도 30대에 다녀본 경험이 있다. 그곳은 나이차별이 심지어 법적으로 보장된 곳이다. 정년퇴직이 그것이다. 일정한 나이가 되면, 무조건 직장에서 쫓겨나야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법률적 제도를 현대판 고려장이라고 여기고 있다. 이런면에서, 어느정도 나이가 든 나는, 한국직장보다 미국직장의 가장 큰 장점은 법적 정년제도가 없다는 점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다. 한국직장에 다니는 나의 대학동기들중 임원이 되지 않은 녀석들은 거의다 퇴직 당한 상태이다. 물론, 그들 대다수는 중소기업에 2차 취업해서 여전히 사회활동중이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100세시대라며 난리중이다. 사람이 일을 하지 않으면, 삶을 살아내기가 쉽지 않다고 나는 철썩같이 믿는 편이다. 내 경우엔 나의 두 부모님 수명을 평균내어 판단컨데 아마도 70대 중반까지는 일을 할 수 있는 수명을 타고난 것 같다. 그래서 그 때까지 일하고 싶다. 그것도 강렬하게. 문제는, 이 빌어먹을 문화이다. 나를 만든 8할이 한국 문화이고, 남은 여생을 미국문화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노인들에게 부정적인곳에서 나의 자아 정체성을 부여받고선, 성인이 되고 난뒤엔, 나이차별로 법적 문제까지 엮일수 있는 미국 문화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운명은 또다른 새로운 도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을 몇년전 부터 어렴풋이 해왔던 기억이 있었던 지라, 재 작년에 옮긴 현재의 직장에서 나는 나의 이름을 미국식으로 바꾸었다 (마이클로). 나를 호명하는 이름속에 한국냄새 (또는 나이냄새)가 더 이상 배어 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런 냄새를 타인이 맡을까바 걱정되는게 아니라, 내 스스로 맡게 될까바 걱정이라서 그런것이다. 몸은 예전보다 낡았지만, 그것을 낡은 신체로 생각지 않고, 원래 약한 신체라고 스스로에게 거짓말하면, 나이듦에 따른 신체의 허약해짐이라는 나이와 신체 변화 상호작용감을 어느정도 누그러트릴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새로운 나를 구성중이다. 이게 나의 미국직장에서 나이 먹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