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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과학소설의 타임머신을 실제로 발명치 않고서, 흘러간 과거가 과연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그것도 섬광처럼 다시 우리들 눈앞에 나타서는, 현재의 삶에 심각한 영향을 줄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발터 벤야민의 글들을 읽고나서 늘 내 머리속을 떠나지 않던 화두였다.
뜨거운 여름날씨에 지쳐가는듯 보였던 가족을 데리고, 오랜만에 시원한 액션 영화나 함께 보려고, 어제 우리 가족들은 톰크루즈의 “미션 임파셔블 5편 :로그네이션”을 관람하였다. 그리고, 나는 이글의 제목과 같은 “지난 과거가 섬광처럼 도래함”을 잠시 확인하는 순간들을 즐겼다.
기대치 않았던 여자 주인공 레베카 퍼거슨의 (극중이름은 일사 파우스트) 액션도 좋았지만, 이 영화중에 삽입된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의 장면들중 (1926년 첫공연), 두 남녀 오페라 주인공인 투란도트공주와 칼리프 왕자라는 내용이, 바로 미션 임파셔블의 두 남녀 주인공인 톰크루즈와 레베카 퍼거슨의 역할이었던 이단과 일사의 역할과 중첩되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이 영화는 1942년에 상영되어진 영화 카사블랑카의 두주인공 잉그리드 버그만과 험프리 보가트의 역할과도 겹쳐진다는 것이다 . 잉그리드 버그만의 극중 이름도 일사이고, 잉그리드도 스웨덴 출신, 미션임파셔블의 레베카도 스웨덴 출신이다. (카사블랑카의 배경장소였던 모로코도 미션 임파셔블 영화중에 자주 나온다. 특히, 액션의 백미였던 오토바이 추격전)
20년대 오페라와 40년대 영화는 한세기가 바뀐지도 제법되어버린 2015년의 한 액션영화에 고스란히 섬광처럼 스며돌아와서는,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인간들 본연의 삶과 관계의 역동성과 그리고 그 얽힘들의 본질들은 여젼히 바뀌지 않고 있음을 깨우쳐 주고 있으며, 심지어 제 아무리 현란하고도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의 과학기술이 발달하더라도, 우리가 고통스럽게 헤쳐나가야 할 삶들에 대한 해답은 오히려 과학기술과는 별로 상관 없는 과거 그 어느때의 한순간들에 기억과 그에 대한 깊은 사유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섬광에 대한 영화 미션 임파셔블의 사례 말고도, 한국의 김동추 교수 인터뷰에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에 관한 짧은 평이 아래와 같이 나오는데, 잠시나마 개인적으로 내가 놀랜것은 이승만의 생각이 한동안 내가 한국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생각과 상당히 유사했음이고, 이것 또한 지난 과거가 섬광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돌아올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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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초기에는 독립협회 회원이기도 했잖아요. 이승만이 과거시혐 몇 번이나 봤는데도 떨어졌어요. 이게 꼭 실력이 없어서 떨어졌다기보다는 당시 과거시험이 워낙 썩고 타락한 탓도 있는데, 이것 안 되겠다 해서 움직이다 결국 감옥 가서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영어 배우지요.결국은 미국이 시대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걸 간파했고, 그래서 미국 가서 국내에서 독립운동하는 사람들 비웃으면서, 백날 해 봐라 독립이 되나, 그러면서, 세계가 강대국 권력정치의 판도에 따라 움직이는데, 앞으로 미국이 어떻게 하는지가 결국 조선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건데, 그 안에서 되지도 않을 독립을 위해 목총 들고 일본놈들 상대하겠다는 놈들, 정말 한심하다. 그게 이승만의 생각이었죠. 그 이승만하고 윤치호하고 그 후예들이 지금의,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고 있다. 지금의 주류가 그런 거죠. ”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미국에서 알고 지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주된 화제거리가 노후대책이고, 그에 따른 미래설계이다. 하지만, 과거를 고려치 않는 미래가 진실한 미래설계일지 나는 잘 모르겠다. 아무리 꼼꼼하게 미래를 설계해놓고, 또한 설계한 대로 미래를 맞이하여 만족하게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어느순간 새롭게 (섬광처럼) 발견된 지나간 과거의 사실이나 역사는 만족스런 우리들의 현재 (지금)을 치욕에 몸을 떨게 하거나 깊은 우울에 빠트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삶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선형적인 시간관에 깊게 지배받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천국을 숭앙하는 기독교 문화의 영향이라고 보고 있다. 과거의 지은죄를 참회하면 그 누구라도 천국을 맞이 할 수 있다는 기독교 문화 말이다. 더구나, 기독교에서의 참회는 순전한 개인적인 참회 (약간의 목사님 도움이 필요한)로 국한되어 있다.
하지만, 인류가 생긴이래로 (기독교도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인류의 시간관은 과거-현재-미래로만 세상사를 재단하는 선형적인 시간관만이 존재해온것이 아니라, 순환적인 시간관 (사계절이 반복하듯)도 존재하였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영화의 제목또한, “네가 지난 여름에 저지른 일을 나는 알고 있다”도 있으며, 그러한 과거사에 우리는 결코 쉽게 풀려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 적어도 적절한 참회나 피해자와 가해자간의 적절한 용서와 화해가 없다면 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는 “과거는 섬광처럼 다시 나타난다”라는 발터 벤야민의 주장이 (황당하게 들리기 까지 하지만) 나름대로 깊은 통찰에서 나온것이라는 생각이다. 우리는 과거인 현재를 살고 있으며, 미래인 과거를 살아왔다는 순환적인 시간관 말이다. 이세상엔 직선만이 아닌, 원도 있음을 나는 새삼스럽게 되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