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 What was I before my parents conceived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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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ㅛㅈㄱㄷ숏ㄱ죠 72.***.204.9 3827

    조계종 고승이신 진제스님께서, 방문자였던 어느 서양 신학자에게 던지 화두였습니다.

    What was I before my parents conceived me?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이후의 자신의 모습에 두려워 하지만, 그렇다고 태어나기 이전에 관한 자신을 두려워 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서양철학의 원류중의 하나였던 에피쿠로스학파 사람들도 “죽는 다는 것은 태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일뿐” 이라고 했답니다.

    도대체 우리는 우리부모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이전에 무슨 존재였을까요? 이것에 대한 깊은 성찰은 “죽음”에 대한 성찰과 다를것이 없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태어나기 이전에 우리는 존재치 않았으니, 태어나기 이전에 대한 내 존재를 생각하는 것은 쓸데 없는 짓거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은 이후에도 우리는 존재치 않는다고 여기면, 이 또한 죽은 이후를 성찰하는 것 또한 쓸데 없는 짓거리임에도 분명하지요.

    그래서, 유가에서 공자는 “살아있는때의 의미도 잘 모르는데, 죽음이후를 왜 고민하는가”라고 일갈 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유태인들의 종교를 뿌리로 가지고 있는 기독교 문화로 이루어진 서양문명이 전세계를 석권한 이후, 대다수 사람들은 유태인들의 시간관념인 직선적 시간관에 젖어들게 되어서 그런지, 과거, 현재, 미래로 이루지는 직선적 시간관에서 항상 주된 관심사는 미래인바,  태어나고(과거) 살아가다가 (현재), 죽고난이후 (미래) 라는 직선적 시간에서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도 항상, 죽음이후 (미래)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입니다.

    기독교적 시각의 서양문명적 관점에서는 태어나기전의 우리존재는 지나가버린 과거라서 굳이 성찰해볼 필요가 없다는 것 입니다.

    하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라는 순환적 시간관을 가지었던 동양적 문화관점에서는 과거가 그냥 과거가 아니라, 하나의 원과 같은 미래다음에 이어지는 과거, 다시말하면, 미래의 미래가 되는 과거인지라,  우리들이 태어나기 이전에 관한 우리들의 존재는 우리가 우리 삶을 성찰하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화두가 된다는 생각 입니다.

    진제스님에게 그러한 화두를 받은 서양 신학자는 3일간의 짧은 한국방문동안 그 화두에 집중한 끝에, 진제스님에게 답하기를 “자비”라고 하였고, 진제스님은 “선문에 대한 답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답변” 이라고 했습니다.  틀린 답변이라는 뜻이지요.

    아마도, 수억번 되풀이되는 불교철학의 “환생” 개념을 염두하면서 답해야 할 선문답이 아닐까 여깁니다.

    죄를 많이 지으면 축생으로 태어나거나, 업보를 다음생에서 치러내야 한다는 불교적 시각은 기본적으로 순환적 시간관에 근거하는 것일 테니까요.

    그리고, 이것은 수십만번 생의 반복속에 연결되어지는 “인연” 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봐야 하는 화두가 바로 “What was I before my parents conceived me?” 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나는 우리 부모와 어떠한 전생인연(이것은 수억번의 인연과 업보의 씰줄 날줄의 결과)으로 부모님의 자식으로 태어난것인가에 대한 성찰이고, 바로 그것이 태어나기이전의 내 존재에 대한 성찰이며, 나아가서, 현생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는 방법과 업장이 내가 죽은 이후의 내 존재를 규명하는 밑거름이 되는것 이지요.

    마치, 봄에 열심히 씨를 뿌리고, 여름에 피나게 땀 흘리지 않고서는 가을에 풍성한 곡식을 거둘수 없고, 그래서 겨울을 생존해내기가 힘들어, 그 다음해 봄에는 아예 새로운 생명을 보지도 못하고 땅속으로 죽어 없어져, 다른 생명체로 태어나는 반복의 순환적 시간관이 떠오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의 근본원인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동시에 지금 우리의 삶은 우리가 죽고난 이후 무엇인가로 다시 환생한 이후 삶(그것이 인간의 삶이건, 축생의 삶이건, 곤충의 삶이건간에)의 밑그림 또는 기초공사가 되는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은 지난 겨울 소돼지 300 만 마리를 산채로 땅에 묻었습니다. 그것도 인간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기때문에 그들을 땅에 생매장 한게 아니라, 자본(돈)이 손해나지 않기 위하여 300 여만 마리의 생명을  그냥 죽였습니다. 아마도, 그러한 댓가를 우리는 현생에서 치러내지 못한다면, 수억번 반복되어지는 업복의 환생속에서 치러내야 하는게 아닌가 여겨 집니다.

    What was I before my parents conceived me?

    • 구제역 71.***.20.68

      뜬금없는 구제역 야그입니다만…
      선견지명이 있으신 이명박 각하 덕분에 사전에 미국산 고기들을 공급할 수 있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 아닌가? (그런데 이 각하 취입식에 미축산업자들이 참가했었나요?)
      덕분에 우리 하천을 오염시키는 주 원인 중의 하나인 축사 오수의 유입량도 꽤 줄일 수 있어, 향후 4대강 사업시 수질 관리에도 도움이 될듯 싶고… 축사가 줄어드니 4대강 주변 지역 정리 사업(?)에도 도움이되려나? 찌질한 축산 행정 덕에 누군가는 덕을 보겠네요.

      그리고 어쨋든 남의 살로 돈 버는 사람들이 줄어 한국내 업도 줄어드는건가요?

      • ㅛㅈㄱㄷ숏… 72.***.204.9

        풍자적인 말씀이시네요

    • 선문답 98.***.227.197

      우주는 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우주에 가득찬 생은 생명체를 빌려서 나타납니다. 이렇게 빌린 생명체가 다하면 생은 또다른 생명체로 표현됩니다. 우주에 가득찬 생은 너와 나의 구별이 없고, 네가 곧 내가 됩니다. 현생에 미련을 갖거나 욕심을 갖을 의미가 없지요.

      생명체가 사는 세상들은 단계가 있습니다. 지구는 중간 수준의 세상입니다. 당신은 지구에 사는 생명체인데 마음을 갈고 닦으면 다음에는 좀 더 좋은 세상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 좀 더 좋은 세상에서는 내것이 네것이고 네것이 내것이니까 나를 위하는 것이 결국은 남을 위하는 것이고 남을 위하는 것이 결국은 나를 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Christianity의 canon rule하고 같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마음을 갈고 닦아서 서로를 사랑하면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이 완성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현생에서 마음을 갈고 닦으면 다음 세상에서는 더 좋은 세상으로 갑니다. 같은 맥락에 더 좋은 세상에서 타락하면 지구같은 세상으로 옵니다. 지구보다 더 열악한 세상에서 마음을 갈고 닦으면 다음 세상은 지구 수준의 세상으로 진급되서 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구는 항상 현재의 수준입니다.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on earth’는 절대로 안되는 겁니다. ‘thy will be done only in heaven’만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더 좋은 세상이나 heaven에 가면 생활이 어떨까요? 일단 고뇌나 stress가 없겠지요. 항상 행복과 평화만이 가득한 dimension일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평화만이 존재하는 곳에서 평화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까요? 내가 100만불을 갖고 있으면 부자라고 생각되는 이유는 남들이 나보다 훨씬 적게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100만불을 갖고 있다면 부자도 거지도 없는 세상이지요. 이런 경우에는 ‘부자’라는 단어가 필요없듯이 이 세상이 평화만이 가득하다면 ‘평화’라는 단어가 없겠지요. 그러므로 평화라는 것은 이 지구같이 선과 악이 공존하는 dimension에서만 가능하다는 얘긴데, 결국은 원점으로 돌아왔군요.

      • ㅛㅈㄱㄷ숏… 72.***.204.9

        빛은 어둠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빛은 밤에 더욱더 빛나는 이유이고요
        그런데, 서양과학기술은 전기불로 밤에 어둠을 완전하게 밀어내 버렸습니다. 그래서 빛도 어둠도 모두 사라져 버렸지요.

        님이 언급하신것 처럼, 모두가 100만불을 가지고 있다면, 부자도 거지도 없는 세상이 되버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달리보면, 부자건 거지이건 모든 사람들의 가치를 지워 버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치 전기불이 밝혀졌을때, 어둠과 빛이 함께 사라진것 처럼 말입니다.

      • ㄴㅇㄴ 76.***.116.32

        선문답에 대해선 잘모르지만,
        성철스님이란분의 죽기전 글을 보면,
        윗분의 말씀처럼, 그 스님이 선문답에서 결국얻은건, 원점으로 돌아온걸 깨달은거 밖엔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보통사람들은 도를 닦지 않고 살다죽으니 그런가보다 하지만, 도를 평생 닦다가 결국 원점에서 한걸음도 진전하지 못했다는 깨달음으로 죽을때는 얼마나 허망할지…

    • 화장실 67.***.159.14

      먹은건 없는데 똥은 싼다 – 기독교
      먹은게 있으니 똥을 싼다 – 불교
      먹은게 없으니 똥도 없다 – 무신론

    • 존재 136.***.250.100

      ‘나’는 그냥 존재하는 것이고 한번도 태어나거나 없어지거나 않았는 데 before & after가 무슨 상관이 있을 까요? 진제 스님이 무슨 의도로 그런 화두를 던지셨는 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그 신학자의 대답이 맞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는 잠시 어떤 DNA의 옷을 입은 육신을 타고 태어나 짧은 현생을 살다가 육신을 벗을 뿐이고 본질적인 ‘나’는 사랑 혹은 자비로 스스로 존재할 뿐이지요.

      • ㅛㅈㄱㄷ숏… 72.***.204.9

        산도 그냥 존재하고, 바위도 그냥 존재하며 저기에 서있으니, 님의 말씀대로라면, 저 산의 본질과 바위의 본질도 그냥 사랑이고 자비이겠군요.

        저는 사랑이나 자비도 모두 없다는 생각이고요, 그저 무한반복되어지는 업장의 연들이 빚어낸 것이 바로 우리들이고, 저 산이고, 저 바위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사랑 자비, 그런거 모두다 가짜 입니다.

        사람이 자연의 일부라고 여긴다면, 자연이란게 과연 자비와 사랑을 담고 있을까요?

        • 존재 24.***.209.194

          산도 바위도 실제로 존재한다고 볼 수 없죠. 오직 그것을 인식하는 ‘나’만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죠. 전자 오락 게임을 할때 전자 오락 게임기 안에 세상이 실존하지 않지만 게임기 밖에서 게임을 하는 ‘나’는 존재 하듯이 말이죠.

          그런데 ‘나’가 무엇인지 깨닫는 것이 어렵죠. 단순히 영혼도 아니고, 나의 생각, 감정, 지식, 에고,… 이런 모든 것들이 아닌 더 본질적인 것이니까요. 그것을 깨닫게 되면 나는 그냥 가만히 관찰할 뿐이고 모든 게 그냥 자동으로 움직이게 되는 거죠.

          • 고스트 71.***.20.68

            갑자기 ‘Ghost in the Shell’이란 만화영화 시리즈 전편이 보고 싶다.

    • 198.***.210.230

      만약 “나” 라는게 내 육신이 만들어낸 현상 즉, 그렇게 느끼게 만드는 내 육신 속의 대뇌, 신경, 호르몬등의 조합으로 나타난 복잡 난해한 구성속의 정신적 산물이라면, 그래서 만약 “나” 라고 느끼는게 나 혼자 만이 가진 고유의 인자가 아닌 모두가 똑같이 가진거라면, 다시말해 수십억 우리네 모두가 같은 영혼을 가진거라면, 우리가 말하는 “영혼” 이란게 세상에 딱 하나 밖에 없다면…

      오우…오늘 너무 많이 머리 썼네, 좀 쉬어야겠다….헐

    • 창조 99.***.2.31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게 아무것도 있는게 될 수 있습니까? 존재하지 않던게 존재한다면 분명히 그것을 존재하게 한 무엇이 있는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지 않고서는 다른 어떤 이유로도 우리가 숨쉬며 살고 있는 것을 설명할 수 없게 됩니다. 윤회란 창조가 없었다면 일어날 수도 없는 상상이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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