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271
한국교회의 금전적 부패가 매우 치명적인 이유는 ‘구조적인 헌금 강요’가 은밀하게 뿌리를 내리고 ‘토착화’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인위적이며 암묵적인 헌금 강요가 예배 속에 위장하거나, 조직 속에 숨어서 은근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우선 교회 입구에 늘어놓은 ‘기명 헌금 봉투’가 그것입니다. 헌금자 이름을 적어서 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르실까 염려하여 이름을 적는 것은 아닙니다. 이름을 알리거나 알아주어 헌금을 부추기자는 의도입니다. 극소수의 신자들만이 무기명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입구(入口)에서부터 악취가 진동하건만 자신만 모르고 있습니다.
같은 이유로 주보에 헌금자 명단을 공개하기도 합니다. 이는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매우 부끄러운 악습입니다. 연보의 본래 목적이 구제임을 감안할 때,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주일 예배 시간에만 있던 헌금 순서도 부흥회, 구역 예배, 헌신 예배, 그리고 기도회 등 모일 때마다 하는 것으로 점차 확대하고 있습니다. 신도들의 주머니를 마른행주보다 더 쥐어짜고 있습니다. 물론 헌금 때마다 ‘애절한 헌금 기도’를 통하여 감사와 헌신과 ‘바침’을 강조합니다. 기도 중에는 특정 헌금자들을 호명하기도 합니다. 매주일 실속 있게 헌금 독려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십일조 의무화’야말로 한국교회 헌금 강요의 본체이며 핵심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가 구약의 율법이었으며 신약 교회에서 폐지된 제도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당시 교회 내에는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헬라인이나 기타 민족 출신의 신도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유대인 고유의 율법이었던 ‘할례’나 ‘십일조’를 억지로 강요하지 않은 것은 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특히 멀리 고린도, 안디옥, 그리고 에베소 등의 이방 교인들이 ‘유대 지역의 세금’인 십일조를 추가로 낼 이유는 더더욱 없는 것입니다.이 유대의 십일조를 최초로 부활시킨 것은 교권주의에 잠식된 중세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중세 십일조’ 역시 교회의 타락과 함께 한동안 극성을 부리며 추태를 보이다가, 결국은 종교 개혁의 철퇴를 맞고 다시 사라졌습니다. 그런 이유로 오늘날에는 가톨릭조차도 십일조를 의무화하고 있지 않습니다.
구약 신정 국가의 세금이었던 율법적 십일조를 오늘날에도 강제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별로 없습니다. 일찍이 개혁 신학자인 박윤선 목사님도 ‘신약 시대에 십일조는 의무가 아니다’라고 분명한 선을 그으셨고, 손봉호 교수님 역시 같은 견해를 밝히셨습니다. 그런데 미국 일부 근본주의 교단과 오순절 교단을 제외한다면,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의 목사들만이 교파를 초월하여 ‘거국적으로’ 단결해 이 십일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구약 말라기서에는 십일조를 하면 복을 주시겠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기 전까지는, 예수님도 할례와 다른 율법들을 몸소 지키시며 십일조 역시 바르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를 부분적으로만 해석하여, 지금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명백한 오류입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지금도 유대인처럼 ‘할례’를 해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억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구약 율법의 ‘의식법’들은 물리적으로 폐지되었습니다. 아니 예수님을 통해 그 율법들이 완성되었다고 표현함이 더 옳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 시대 신자들은 더 이상 구약의 제사나 제물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제물이 되셔서 제사의 목적을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제사직을 감당한 레위인도, 성전도 더 이상 필요가 없고, ‘레위인들을 위한 십일조’도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즉 십일조는 예수님에 의하여 이미 2,000년 전에 시효가 말소된 제도입니다. 역사적으로도 AD 70년 로마군의 침공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후, ‘성전에서 현물을 바치던’ 율법의 십일조는 유대 신정 국가와 함께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십일조에는 무슨 복잡한 사연이 숨어 있는지, 신학을 제대로 잘 배운 목사들마저도 이 문제로만 넘어오면 그 명석하던 머리가 갑자기 전기 나간 밥통처럼 이상해집니다. 전 세계 기독교인의 불과 5% 미만이 하고 있는 십일조를, 한국 목사들은 무려 95% 이상이 열성적으로 지지한다는 어느 희한한 통계 결과가 이를 잘 증명해 줍니다. 또한 ‘목사 공화국’인 한국에서 십일조를 반대하는 목회자들이 왜 왕따를 당하는지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도 거리낌이 있는지, 십일조가 ‘신자의 강제적인 의무’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습니다.중요한 사실은 사도들이 주도한 초대 교회에 모일 때마다 ‘하나님께 돈이나 재물을 바치는 행위’는 전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단지 ‘가난한 다른 교인들의 구제를 위한 연보’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것도 처음에는 ‘비정기적인 모금’이었습니다. 즉 본래 연보는 제물처럼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과 나누기 위한 모금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웃과 나누는 것을 예수님께 행한 것으로 간주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연보’가 언제부터인지, ‘바친다’는 의미가 강한 ‘헌금’이란 용어로 슬쩍 바뀌었습니다. 연보의 참된 의미를 약화시키는 행위입니다. 이는 마치 오늘날 ‘예배당’이란 명칭이 슬그머니 ‘성전’으로 둔갑한 것이 연상됩니다. ‘성전’이라는 기만적 용어를 통하여 이미 건축 헌금 모금에 큰 재미를 보신 거룩한 목사님들께서는, 돈을 더 거두기 위해 ‘모금’보다는 ‘바침’을 강조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이런 면에서 어느 분의 지적처럼, ‘헌금을 바친다’는 표현보다는 ‘연보를 한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입니다.한국교회는 변질의 명수입니다. 연보는 헌금으로, 연보 궤는 헌금 채로, 예배당은 성전으로, 목사는 제사장으로, 주의 종은 교회의 왕으로, 그리고 ‘중세적 십일조’를 복제하여 ‘한국적 십일조’로 변질시켰습니다.
또한 본래 레위인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제정된, 십일조나 연보가 한국에서는 도리어 가난한 교인들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거꾸로 십일조나 연보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가난한 신도들에게도 ‘무차별적으로’ 헌금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방앗간에만 마음을 둔 교권주의자들이 하는 일이란 늘 이런 식입니다.
한국교회는 더 이상 말을 돌리며 신자들을 기만해서는 안 됩니다. 십일조이든 다른 어떤 헌금이든, ‘헌금 강요’는 성경적 진리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종교적 범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어떤 이유로든 신도들에게 헌금을 ‘수치화하여’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수입의 십 분의 일을 무조건 강요하는 것은 사도들이 전하지 않은 ‘다른 복음’입니다.
만일 아직도 ‘한국의 십일조’가 성경 원리에 근거한 ‘바른 복음’을 따르는 것이라고 확신한다면, 우회적으로 변죽을 울리며 말을 돌리지 말고, 차라리 ‘십일조는 모든 신자의 의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을 하십시오.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인 그런 십일조란 없습니다. 따라서 어설픈 말로 신도들을 속이지 말고, 분명한 나팔을 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모든 신도들에게 ‘세금처럼’ 철저하게 강요하십시오. 새 신자들에게도 처음부터 솔직하게 알려 주십시오. 믿음이 연약한 신도들도 고집스럽게 설득하십시오. 또한 가난한 이들에게도 지금처럼 세속적인 복으로 유혹하며 계속 강요하십시오. 그리고 그동안 해 온 것처럼, 십일조를 열심히 했는데도 망하고, 병들고, 실패한 신도들의 실상은 깊숙이 숨기십시오. 반대로 부자 되고 성공한 신도들의 간증만을 잘 추려서 널리 떠벌이십시오.
…
만약 십일조가 성경적인 것이라면 목사님들도 성경에 맞춰 살기를 바라는 신도들에게 공개적으로 십일조의 중요성을 천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십일조는 아직도 교회 내에서조차 말하기 껄끄러운 주제입니다.
만약 본문에 있는대로 미국 원리주의자들 중 일부와 한국 교회만이 십일조에 집착을 한다면 그건 참으로 부끄러운 성경에 맞춰 살지 않는 거짓 믿음이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