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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11. 24 – YWCA 위장결혼식사건>
1979년 11월 3일
故 박정희 前 대통령에 대한 국장이 진행되었다.
박 대통령 서거 이후 김대중, 김영삼, 윤보선 등 민주계열 인사들은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을 비롯한 공화당 인사들에게
‘유신잔당’이라고 비난하며 당장 내각 총사퇴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79년 11월 24일
이에 윤보선 공동의장을 비롯한 민주계열 인사들은
이들은 서울 명동에 위치한 YWCA에서 결혼식을 하는 것처럼 위장한 후에
이 결혼식에 참여한 후 反정부 민주화 시위를 개최한다.
그러나 윤보선 등 민주계열 인사들을 미행한 경찰 등이 상부에 보고를 올리고
이 보고에 따라 출동한 군경에 의해 YWCA 위장결혼식사건에 참여한 인사 154명은
계엄군에게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된다.
<1979. 12. 6 –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 선거>
대통령 당선자 최규하
1979년 12월 6일
유신헌법에 의거한 간접선거로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1979년 12월 8일
대통령 당선자 최규하는 긴급조치 9호를 위반하여 수감되었던 68명을 석방한다.
더 나아가 김대중에 대한 가택연금조치를 해제하여 일종의 특별사면을 시행한다.
<1979. 12. 12 – 12.12 사태>
1979년 12월 12일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하는 하나회 세력이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체포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하나회 세력이 정승화를 체포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0.26 사태 당시 정승화가 ‘사건 장소인 궁정동 안가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즉, 암살범 김재규와 공모하여 박 대통령 암살에 공조하였다는 이야기였다.
<쿠데타? 단순 사고?>
1994년 10월 29일
검찰은 아래와 같은 이유를 설명하며 12.12 사태를 군사반란이라고 규정한다.
전두환·노태우 前 대통령 등이 하극상에 의한 군사반란을 일으킴으로써
헌정사를 후퇴시킨 점등에 비춰 공소제기를 통해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들을 기소할 경우 재판과정에서 과거사가 재론되는등
법적 논쟁이 계속돼 국가분열과 대립양상을 재연함으로써 국력을 소모할 우려가 있는데다
이들이 이미 5공청문회 등을 통해 국민적 심판을 받을 것으로 볼수 있다.
특히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워 단죄할 경우
그동안 형성된 제반 질서와 관련해 국민에게 심정적 혼돈을 느끼게할 우려가 있는 점 등을 감안,
사회안정과 국가발전을 위해 이들에 대한 기소처분을 유예키로 했다.
<12.12에 대한 노태우의 해명>
하지만 12.12 사태에 참여하였던 노태우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2.12사태는 국가원수를 시해한 김재규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그 사건에 관련이 있다고 의심되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려다가 일어난 돌발사고였다.만일 이 사건을 쿠데타로 규정한다면 쿠데타의 구성요건인 ‘사전계획’이 있었어야 하는데
수사 계획 이외의 말을 어느 누구에게서든지 들어 본 적이 없다.역사상 어느 쿠데타도 병력을 동원하는 부대장이 부대를 이탈해
지휘할 수 없는 곳에 가 있은 예는 없었다.다시 말해 쿠데타가 성립될 수 있는 구성요건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노태우 회고록 상권 – 240페이지 中
<5.16과 12.12>
잠깐 본인이 노태우의 회고록에 쓰여있는 내용에 대해 부연을 하도록 하겠다.
5.16 군사혁명같은 경우는 박정희 소장을 주도로 한 군부가 계획을 수립한 후
박정희 소장은 가족을 박태준에게 맡기고 그 자신은 군대와 함께 서울을 점령했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12.12 사태의 예를 보자.
전두환 소장같은 경우는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함과 동시에
최규하에게 정승화 체포에 대한 재가를 받을 것만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규하 대통령은 “국방부장관(노재현)이 없으면 재가할 수 없다”고 예상 외의 발언을 하였고
이에 전두환과 하나회 세력은 노재현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된다.
이런 와중에 장태완, 정병주 등이 나서 하나회 세력을 진압하려 하였다.
이렇게 사태가 급박해지자 노태우 제9보병사단장은 휴전선 부근에 주둔하고 있는
자신의 병력(제9보병사단) 중 일부를 급히 차출하여 서울로 불러들이게 된다.
만약 12.12가 정말 ‘쿠데타’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5.16의 예를 본받아
군대를 이끌고 국가기관을 단숨에 점령하고
反하나회 세력이 집결을 하지 못 하도록 애초부터 봉쇄했어야 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역사적 사실로만 구성되어있는 조갑제씨의 공수부대의 광주사태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12.12사건은,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소장 그룹이
상관인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불법적으로 연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군사변란이었다.정승화 장군 연행이 계획대로 저항 없이 이뤄졌더라면
전두환 소장은 대통령을 꿈꾸지 않았으리라는 가정도 성립한다.유혈 사태가 생겼기에 전두환 세력은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
집권으로 매진하여 두 대통령(전두환, 노태우)이 생겼다.공수부대의 광주사태 – 15페이지 中
<하나회 세력의 군권 장악>
12.12사태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함과 동시에
反하나회 세력(장태완, 정병주) 등을 진압함에 성공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자신의 측근들을 군의 요직에 임명한다.
육군 제1군단장 황영시는 육군참모차장에 임명하였고
육군 제9보병사단장 노태우는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하였으며
육군 제50보병사단장 정호용은 특전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정승화의 체포로 공석이 된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에는 중앙정보부장 서리였던 이희성을 임명한다.
또한 노재현의 사퇴로 공석이 된 국방부장관에는 공군참모총장이었던 주영복을 임명한다.
※이희성과 주영복은 12.12사태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전두환에 의해 요직에 임명되었다.
<1979. 12. 21 – 최규하 정부 출범>
1979년 12월 21일
최규하 대통령 당선자가 정식으로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최규하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정부 별도로 헌법 개정에 대한 연구와 검토를 하겠다”고 밝힌다.
※여기서 말하는 헌법 개정이란 ‘유신헌법 철폐’를 뜻한다.
-유신헌법-
1. 대통령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선거제로 선출한다.
2. 대통령이 일정 수의 국회의원을 지명하여 임명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제8대, 제9대 임기와 최규하 대통령은 유신헌법에 의거하여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국회, ‘유신잔당’에게 ‘개헌’을 맡길 수 없다>
국회는 최규하 대통령의 취임사에 대해 격하게 반발했다.
그 이유는 본인이 이 글 위에서 이미 밝혔지만
야당 세력은 최규하 정부를 ‘유신잔당’이라 비난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들은 최규하 정부를 신뢰할 수 없다고 밝혔으며
최규하 내각은 즉시 사퇴하고 ‘개헌 주도권을 국회에 넘기라’고 압박하였다.
그러나 최규하 대통령은 국회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으며
이러한 이유에서 정부와 국회는 서로 대립하게 되었고
이는 대한민국 정치계가 안정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1980. 3. 6 – 충정훈련 실시>
1980년 3월 6일
군권을 장악한 하나회 세력은 국민들의 민주화 시위가 격해짐에 따라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했을 경우, 군을 투입하여 진압하게 하는 계획을 수립하였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충정훈련(시위진압훈련)을 전군에 명령하게 된다.
<1980. 4. 21 – 사북사태>
1980년 4월 21일
강원도 춘천시 사북면에서 ‘사북사태’가 발생한다.
사북면 탄광에서 근무하던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였으나 사측에서 소폭 인상하여 노동자들을 분노케 하여
노동자들이 사북면에 있는 경찰서를 점령, 경찰관 한명이 사망함과 동시에 160여명이 부상 당하는 사태가 빚어진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1980년 들어서 학생들과 교수들, 노동자들에 의한 각종 시위가 발생하였고
학생들과 교수들은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였고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등
박정희 정부 당시 묵살되었던 요구들이 한 순간에 폭발하여 빗발치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국회는 개헌 주도권을 두고 대립하고 있었다.
즉, 정치인들과 국민들 모두 화합하지 못 하고 분열하여
대한민국이 혼란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었다.
<1980. 5. 15 – 서울역 회군>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 모여 민주화 요구 시위를 벌이던 10만명의 학생들이 자진해산한다.
당시 학생들을 지휘하던 사람들은 심재철, 유시민, 이해찬, 신계륜 등이었는데
심재철은 이날(80. 5. 15) “정부는 우리들의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자진해산해야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유시민은 “그렇지 않다. 이대로 청와대까지 진군해야한다. 지금 해산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결국 심재철의 주장이 채택되어 서울역에 모였던 10만명의 학생들은 일제히 해산하게 된다.
<1980. 5. 17 – 5.17 비상계엄확대조치>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이희성, 주영복 등 주요 인사들은 사회가 혼란해졌다는 명목을 내세워
최규하 대통령에게 제주도까지 계엄을 확대할 것을 요구한다.
※1979년 10월 27일부터 줄곧 대한민국은 계엄 상태였으나 제주도는 계엄 지역이 아니었다.
1980년 5월 17일 – 19시 00분
최규하 대통령은 비상계엄령 확대와 관련하여 신현확 국무총리에게 의견을 물은 후에
전두환, 이희성, 주영복 등 인사들이 요구한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수락한다.
1980년 5월 17일 – 23시 00분
이 날 같은 시각, 김대중과 김종필은 비상계엄확대조치에 의해 자신의 자택에서 계엄군에 의해 체포된다.
김대중은 지금까지 시행되었던 학생들에 의한 소요사태 배후조종자라는 죄명이 적용되었고
김종필은 박정희 정부 당시 부정으로 재산을 축적한 부정축재자라는 죄명이 적용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조치(5.17 비상계엄확대조치)가 발표된 바로 다음날인
대한민국 근현대사 중 가장 논란이 많은 역사인 5.18 광주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다음 이야기>
1980년 5월 18일 ~ 1980년 5월 27일
‘광주사태’
다음 시간에 5.18 광주사태 마지막편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참고한 자료 출처>
서울지검·국방부 합동수사보고서(1995년 7월 18일 발표)
조갑제 – 공수부대의 광주사태
노태우 회고록 상권 –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