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사월의 미, 칠월의 솔’―서귀포

제주도의 봄은 샛노란 유채꽃으로 가득하다. 김연수 단편 ‘사월의 미, 칠월의 솔’주인공 ‘팜’이모는 유부남 감독과 제주도
서귀포에 살림을 차린다. 해외여행이 어렵던 시절 제주도는 두 사람이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이었다. / 조선일보 DB친구 대부분이 미혼이다. 하지만 결혼한 친구 중 아이를 낳지 않은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 결혼했지만 아이를 낳지 않은
여자는 이 나라에선 노처녀만큼이나 별난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살면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양육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이는 또 얼마나 예쁜지에 대한 장황한 연설을 들었으니까 말이다. 그때마다 내게도 할 말이 있었다. 노후를
위해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엄마에겐 아이가 보험이냐고 따졌고, 외로움 때문에 아이가 필요하단 친구에겐 우리가 노인이 될
때쯤이면 실버타운이 활성화돼 탁구나 테니스 등 노인들의 체육 활동이 더 활발해질 거란 얘기로 못을 박았다. 그런데 김연수의 단편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의 이 구절을 읽다가 문득 목이 탁 막혀 버렸다.“죽는 순간에 마지막으로 보게 될 얼굴이
누구의 얼굴일지 나는 정말 그게 궁금했어.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이 말이야. 뱃속에 있는 아기들도 그런 생각을 할 게
아니겠니? 밖에 나가면 도대체 어떻게 생긴 작자의 얼굴을 제일 먼저 보게 될까? 양수 속을 뒹굴다가 그런 의문이 들겠지…. 어쨌든
그러면 내가 걔네들이 있는 배에다 대고 말해줄 수 있어. 왜, 태아들도 다 듣고 있다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면 좋아하고, 밉다고
말하면 싫어하고, 이렇게 말할 거야. 일단 거기서 건강하게 나오는 게 제일 중요한데, 나오고 나면 좋든 싫든 네가 처음으로 보게
되는 얼굴이 있을 것이야. 그게 누구냐면 바로 네 엄마란다. 그 엄마는 죽을 때 아마 제일 마지막으로 네 얼굴을 보게 될 거야.
인생은 그런 식으로 공평한 거란다…. 그러니까 죽는 순간에 마지막으로 보게 될 얼굴이 평생 사랑한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면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더라도 그건 불행하다고 할 수밖에 없어. 그러니 무조건 결혼을 하고, 그다음엔 아이를 낳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전부야.”특히 “죽는 순간에 마지막으로 보게 될 얼굴이 평생 사랑한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면…”이란 구절에서 나는 꽤 심란해졌다. 이혼도 재혼도 흔한 요즘, 남자와의 영원한 사랑을 믿는 사람은 없어졌지만, 아이만큼은? 다를 것 같았다.
뉴
욕으로 유학을 떠난 여자. 그녀 없인 안 되겠다 싶었던 남자는 3개월 후 비행기를 잡아타고 뉴욕 플러싱에 있는 그녀의 하숙집으로
달려간다. 학교에서 돌아온 그녀의 비명! 사랑은 그렇게 다시 한 번 불타올랐다. 그해 여름 그는 그녀와 함께 뉴욕에서 렌터카를
빌려 미국의 95번 도로를 질주했다. 플로리다의 세바스찬에 사는 ‘팜’ 이모네 집에 가기 위해서였다. 이틀 동안 젊은 연인들은
모텔에서 잔 시간을 제외하면 끊임없이 이야기했고 쉴 새 없이 운전했다.사실 이 이야기는 팜 이모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지금은 플로리다에서 췌장암 말기 선고를 받은 미국인 남편과 결혼해 살고 있지만 젊은 시절 한때 영화배우로 활동했던
이모는 당시 영화를 찍던 유부남 감독과 정분이 나 그만 제주 서귀포시까지 내려가 살림을 차린다.“그때는 외국으로
나갈 수가 없었던 시절이니까 나름 갈 수 있는 한 가장 먼 곳까지 간 셈이지. 그렇게 서귀포시 정방동 136-2번지에서 바다를
보면서 3개월 남짓 살았어. 함석지붕 집이었는데 빗소리가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우리가 살림을 차린 사월에는 ‘미’ 정도였는데
점점 높아지더니 칠월이 되니까 ‘솔’ 정도까지 올라가더라. 그 사람 부인이 애 데리고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시’ 정도까진 올라가지
않았을까?”감독은 시한부 인생. 조용조용 수줍음 많은 사람이 애인과 야반도주할 용기를 낸 건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안타까움 때문이었는데, 감독의 본부인이 내려와 서귀포의 ‘덕성원’에서 함께 짬뽕 한 그릇을 먹기 전까지 이들의 불안하면서
행복한 동거는 계속된다.사람은 두 부류가 있다. 희망 없는 사랑에 몸을 던져본 적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랑에 목숨 건 체험은 분명히 그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흔들었을 것이고, ‘선택’이란 말의 본질을 바꿔놓았을 것이다. 그런
사랑을 겪어낸 사람이라면 ‘선택이란 선택하지 않은 것을 감당해내는 일’이라고 말할지 모를 일이었다.팜 이모는 그런
인생을 살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죽는 소박한 꿈조차 이루지 못했던 삶. 사랑했던 사람이 모두 자기보다 먼저 죽는 삶
말이다. 어쩌면 그녀는 “불륜녀니 말로가 저리 돼도 싸다”는 주변 입방아의 자장(磁場) 안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런
질문이 가능해진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번뿐이다. 단 한 번뿐인 인생 앞에서 도덕은 무엇이며, 또 윤리란 무엇인가. 어쨌든 팜
이모는 누구의 인생도 아닌 스스로 선택한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았고 그 삶을 책임지고 감당했다.아이를 낳는 것 역시
선택이다. 아이를 낳지 않은 삶을 감당하는 것 역시 선택인 셈이다. 누구에게나 유독 취약한 계절이 있다. 내겐 벚꽃이 피는 4월이
그렇다. 4월이면 집 안에 앉아 있을 수가 없을 지경으로 마음속에서 바람이 분다. 그래서 나는 4월이면 제주도에 갔다.
생각해보니 서귀포의 덕성원에서 꽃게 짬뽕을 먹은 적도 있다. 불행히도 내겐 기억나지 않는 맛이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었으니 올
4월, 제주에 간다면 덕성원에 한 번 더 가볼 거란 건 분명하다. 팜 이모가 먹던 바로 그 짬뽕 맛을 기억하려고 애쓰면서!●사월의 미, 칠월의 솔―김연수의 단편집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