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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423:28:47 #3574146oo 184.***.180.252 411
무녕왕릉보면 너무 이해가 안가던데. 왜 고구려나 한성백제 양식이 아니라 쌩뚱맞은 벽돌식이지? 왜 뼈가 하나도 안남아있나? 뼈도 다 썩어 문드러졌다고? 몇만년전 뼈도 남아있던데 왜?
왕릉이라하기엔 너무나도 초라하기도 하고.순전히 상판데기 기록에 의존해 해석할뿐인데…
드디어 바꿔치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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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발악단계 이군
조금 있으면
말법 으로 가겠군-
그러게. 나도 혼란스러워 진다. ㅋㅋㅋ 이제는 대륙 조선 설까지도 있네.
진짜 중국의 절강성 지역(상하이 근처)은 임란때는 조선 땅이였나? 진짜 왜 이렇게 지명들을 헷갈리게 만들어 놓은거야? 대륙 백제, 대륙 신라 까지는 그래도 수긍이 가는데, 조선 왕조 실록까지 있는데 대륙 조선 설은 좀 너무 하지 않나 싶다. 경복궁 덕수궁 들은 어떻게 설명하려고…그런데 조선 시대에는 팔도를 경상좌도, 경상우도, 충청좌도, 충청우도 등으로 불렀음을 아래보면 볼수가 있다. 이건 오늘날의 망국적 지역감정을 없애기 위해 오늘날에 행정구역을 바꾸어야 함을 제시해주고 있다.
즉, 현재의 전라남도를 경상우도(서울에서 서서 남쪽 아래쪽을 바라보므로), 현재의 경상남도를 경상좌도로 바꾸어야 하고, 현재의 전라북도를 전라우도, 그리고 현재의 경상북도를 전라좌도 로 바꾸어야 한다.
===========================이해할 수 없다는 임진왜란 사료들
필자는 『고대조선과 근조강역연구』라는 책을 내면서 ‘명사에 보
이는 사료’ 라는 항목을 따로 만들어 인진왜란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님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부족했
다는 생각에서 임진왜란만을 다루어 보려고 자료 구하기에 나섰다.
『명사』와 『선조실록』·『이순신전서』·『이순신전집』(1916년
일본판) 등은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었으나, 『난중일기』는 번역서는
있지만 원문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던 중 여러 서점을 돌아다닌
끝에 가까스로 책의 말미에 원문이 들어 있는 번역서를 구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내가 구한 『난중일기』번역본 서문을 읽어 보니 역자는 나
름대로 고생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먼저 『난중일기』가 한두 종류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종류도 많은데다가 내용도 서로 틀리고 문장도
뒤바뀐 흔적이 보여서 어느 것을 원본으로 삼느냐에 고심도 많았을
뿐 아니라 막상 번역을 하자니 지명 고찰에 들어가서는 많은 곳에서
황당해졌다는 등 애로를 털어놓고 있었다. 물론 그 번역서는 반도사
관에서 작성된 것이었으나 필자는 번역자와 한번 통화를 하고 싶었
다. 왜냐하면 지명에 대한 애로가 가장 컷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출판사에 알아보니 역자는 최두환이라는 현역 해군 중령이었는데,
해군본부 충무공수련원 연구실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진해에서 근
무하고 있다고 했다. 출판사에서 내준 전화번호로 통화를 했다.“지명에 대해 특히 어려웠다는 말씀인데, 어떻게 어려웠나요?”
넌지시 물어보았다.
“지명을 놓고 계속 추적하다 보면 중국, 그것도 절강성과 연결되
곤 하는데 그것이 이상합니다.”
그러면 결국에는 임진왜란이라는 사건은 절강지방과 무관하지
않다는 말이네요”
필자는 시치미를 떼고 슬그머니 그의 의중을 떠보았다.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전고(典故)나 자전(字典)에서 그렇게 나올 뿐
이겠지요.”
“그렇게 생각합니까? 저도 나름대로 역사를 뒤적이고 있는 사람인
데 아무리 사서를 뒤적여 봐도 임난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사건은 아
닌 것 같아서 통화해 보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 문건이 어디서 보이고 있습니까?”
“보이긴요, 사료를 놓고 볼 때 그런 정황이 나올 뿐이라는 말이죠.”생면부지의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는 필자의 책과 몇 편의 참고가
될 만한 자료를 우송했다. 그는 『난중일기』의 역서뿐 아니라 이순신에
관련된 여러 권의 책을 이미 저술해 놓고 있는 그 방면의 대가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후로는 매일 아침이면 우리는 장거리 통화
로 이어졌고 그가 서울에 오는 일이 있으면 필자의 연구실에 들러
오랜 시간을 역사에 대한 사견(史見)을 교환하게 되었다. 그도 이순신
이라는 인물과 그에 관련된 사료가 많은 오류 속에 담겨 있음을 발
견하고는 있었지만 역사의 큰 테두리를 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글자의 오자 내지는 해석상의 문제로 돌리곤 했다고 말했다.
그와의 2년여의 세월 속에 그의 역사에 대한 인식은 큰 변화를 가
져왔고 그의 안목은 사학에 대한 통찰력을 얻어 역사의 전반적인 전
개를 펴보는 혜안이 열리는 듯이 보였다. 즉 관변사학의 틀에서 벗어
나고 있었다는 말인데, 이런 경우는 필자의 소득 없는 생활 속에 하
나의 보람치고는 가슴 뿌듯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오랜만에 ‘미친
놈’에서 벗어나 동문의 길을 걷는 동지를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던 사료 몇 편과 함께 임진왜란의 해전이
항주만과 양자강으로 보면 애매했던 다른 문제들도 풀려갈 수가 있다
는 설명도 덧붙여 보내왔다. 그 사료 중 일부, 우선 『난중일기』「계사
년」(1593년) 조를 옮겨 보면 이렇다.듣기에 천장(天將) 이여송이 북쪽 길을 따라 올라간 왜적들이
설한령을 넘었다는 말을 듣고는 송도까지 왔다가 서관으로 되
돌아왔다는 연락이 왔다.聞天將李如松 北路之賊 踰雪寒嶺云 到松京 還歸西關事奇到
이 문장만을 보아도 왜적들이 북쪽(北路)으로 갔다고 했지 지명을
나타낸 곳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도 반도사관에 의해 북로가 gkarud
도로 되어 있다. 여기서 송도는 하남성의 개봉(開封)을 말하고, 서관은
섬서성 서쪽 보계(寶鷄) 지방에 있는 산관(散關)을 말한다. 한반도 평안
도에는 서관이 없을 뿐 아니라 그 어디에도 동관·서관·남관·북관
등의 관문이 없다.
다음은 「임진장초(壬辰狀草)」에 보이는 문장들이다.『임진장초』는 임
진난의 전황을 보고하고 군무의 지령을 계달(啓達)하기 위해 필록한
것으로 『이충무공전서』2권에서 4권까지에 수록되어 있다. 이것들은
『난중일기』와 함께 1935년 일제에 의해 ‘조선사편수회’에서 간행한
것이다.·임금이 서쪽으로 난리를 피했다는 기별이 있었다.(聞西行之奇)
·대강 90여 척의 왜선이 본토를 출발하여 경상좌도의 추이섬
을 지나고 있었다(大槪所見九十餘隻亦 本土始出 爭杻伊島過).
·그래서 저는 도이들의 변란이 있을까 염려하여 일찍이 구
선을 준비했습니다(故臣嘗慮 島夷之變 別制龜船).·그들은 본토에서 나와 동강으로 들어왔기에 그것은 잘 되
었다 싶어했다(自本土同江 入來爲有如可).·충청우도의 고을들은 왜적의 침입을 받지 않았으나 수사를
지낸 정걸이란 사람이 혼자서 말을 타고 내려왔다(忠淸道段 右道
沿海之邑 賊未犯境爲白乎矣 前水使丁傑單騎下來).·낙양에는 호인들이 한꺼번에 들어왔다(洛中胡差入城).
·왜인들이 구련성을 넘어 의주로 들이닥쳤다(來在義州越邊九連城).
큰 강줄기의 사람들은 수로를 따라 서관으로 갈 수 있으나
다시 돌아오기는 어려웠다(沿海之人 又以爲從水路西關 則還返難期).·임금을 실은 마차는 서쪽으로 갔으나 백성들은 목숨만 붙
은 고깃덩어리 신세였다( 輿西遷 生靈魚肉).분명한 것은 여기에 쓰인 문구는 하나같이 한반도를 가리키는 것
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반도 전쟁이라면 임금은 북쪽으로 피난을
갔어야 했다. 여기서 본토란 왜의 무리가 소굴로 삼고 있는 복건 해
안을 말하는 것이다. 좌도(左道)란 경상도를 말하는 것으로 추이도는
절강성 해안의 도서(島嶼)를 가리키고 있다.
지금의 일본 열도에서 90척의 배가 출발했다면 떠나는 장면이 ‘대
개 보아하니(大槪所見)’ 라는 표현이 될 수 없다. ‘도이(島夷)’란 복건성
쪽의 대륙 남쪽 사람을 지칭하는 백성으로, 열도인을 도이라고 한 일
은 결코 없었다. 또 한반도에서 임진란이 일어나 야단인데 낙양에 오
랑캐들이 들이닥친 것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대륙조선의 남부
와 중부지방이 왜의 무리로 인해 정신이 없을 때 북쪽 중원지방(洛
陽)에는 호시탐탐하던 거란 여진족의 무리가 내려와 점거했다는 말
이다. 중원의 땅이 왜와 호인들로 들끓자 백성들은 연해, 즉 위수(渭水)
나 하수(河水)(황하)의 물줄기를 따라 서쪽으로 서쪽으로 피난은 갔으
나 다시 돌아올 기약도 없었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선조의 「교유서(敎諭書)」에서 보이는 글이다.·회서의 군사들은 정승 배도를 믿고 따라 그를 만리장성처
럼 여겼다(淮西士卒 得裵度爲之長城).
·그대(이순신)는 황석공의 업적을 이뤄냈으며 재주는 산서의
사람이다(卿業傳 下 才出山西).·저 남쪽은 장무의 병이 많은 곳이어서 그로 인해 죽는 사람
이 많아 걱정이다( 霧蠻煙 多疾死亡之患).·만약 적의 침략을 내버려두었다면 그 화는 조선의 서쪽까
지도 미쳤을 것이다(若정兇圖 必禍延乎西鄙).위 글에서 회서라는 말은 회수의 서쪽이라는 말이다. 회수는 안휘
성을 가로질러 흐르는 물줄기이므로 서쪽이라 하면 하남성과 호북
성의 땅이 된다. 그 다음에 보이는 이하( 下)라는 곳은 강소(江蘇) 지방
비현( 縣) 땅이고, 산서지방은 황하의 북쪽이다. 산서지방에서는 조
선의 명장과 문재(文才)가 많이 배출되었다 해서 고사에 나오는 말이
다. 다음 문장에 보이는 장무( 霧)라는 병은 한반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질병이다. 사시사철 습지로서 온도가 높아 사망률이 가장 많은
중국 남부, 즉 호남·광동·절강 지방에 만연한다.
이 장무라는 질병은 『동의보감』에서도 거론되는 병명으로 조선시
대에 호남지방이 귀양처로 지목되었던 것도 덥고 습하여 질병이 많
아 사람이 살 만한 고장이 못 되었기 때문에 죄인을 이 지방으로 유
배시켰던 것이다.
또 「어제신도비명(御製神道碑銘)」에는 이런 글귀도 쓰여 있다.임진년에 왜적들이 거병하였는데 먼저 부산 동래를 함락하고
여러 길로 나뉘어 서쪽으로 올라갔다(壬辰倭大擧 入拔釜山東萊 分道
西上).부산 동래를 함락하고 왜병은 여러 길로 나뉘어 서쪽으로 진군했
다고 하였다. 앞의 교유서에서도 서쪽으로 치밀었다고 기술되어 있
다. 한반도 상황으로는 북상해야지 서쪽으로 갈 이유가 ㅇㅏㅄ는 것이다.
여기서 주춤거리는 곳은 부산과 동래라는 지명이다. 이것은 한반도
전란으로 꾸미기 위한 지명 조작의 술수가 분명한데 부산만은 완전
히 창작품으로 보여진다. 한반도 내의 현재의 큰 지명은 전고가 넘어
와 식재(植栽)되는 것인데 부산의 전고만이 없는 것을 보면 이런 의문
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모든 사료를 종합하고 판세를 그려 보면 항주가 부산이 되
어진 것이 분명하다. 부산은 『명사』의 임란에서 처음 등장되는 지명
으로 당시의 해전에서 내륙전으로 옮겨지는 과정을 정밀하게 분석하면 그곳이 항주였다는 증명이 선명하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동래(東萊)라는 곳은 본래는 내주(萊州)였는데 그 지역이 넓어 내주 동
쪽이 동래가 되어 본래의 내주는 하남성의 허창(許昌)·상구(商丘) 지방
이었다가, 20세기에 내주는 없어지고 산동성 해안에다 동래란 이름
을 입혀 놓고 있다. 그러므로 항주를 부산으로 정리했을 경우에 동래
는 상해가 되는 것이고, 상해를 부산으로 정리했을 때에는 동래는 해
문(海門)(상해 동쪽 도시 이름)일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어쨌거나 지명은 지명대로 중요한 전고가 되어 지리를 살피는 데
요긴하지만 전쟁의 판세로 본 판도가 한반도와는 맞지도 않을 뿐 아
니라 한반도일 수도 없다. 명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의 길을 빌렸다면
그것은 대륙에 있는 조선의 길을 택한 것이지, 조립해 만든 조선반도
는 서구 열강들에 의해 대륙조선의 틀을 일본을 앞잡이로 이용해 이
땅에 만들어 놓은 것인데 이 땅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날 이유가 있었
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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