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원수는 항상 악한가?

  • #103186
    eroica 98.***.187.97 3447

    종교관련 posting을 처음하는것 같은데요,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분들중에 한분인 한완상교수님의 말씀이(비록 종교적이라도) 종교를 초월하여 많은 지혜로움을 가져다주것 같습니다. 기독교를 promotion하기위해 퍼온글은 아니라는점도 아울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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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원수는 항상 악한가?
    (마태복음 5:9, 43-45)

    2010년 8월 1일 주일예배 말씀증거
    한완상 형제

    지난 5월 27일 저는 무거운 마음으로 로스엔젤리스로 향했습니다. 올해는 여러 가지 남북 간 악재들이 터져 나와 6.15공동선언 10주년을 제대로 기리지 못 할 것 같다고 판단한 재미 통일 일꾼들이 저에게 기념강연을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떠나기 바로 전날, 미국 장로교 총회장과 미국 교회협의회 회장을 엮임 했던 이승만 목사님이 전화 주셨습니다. 6.15기념강연을 둘러싸고 미국 내 통일 일꾼들이 갈라져 다투고 있으니 저 보고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기독교 냉전근본주의자들이 강연장에서 저를 당혹시킬 공세를 취할 것 같으니까 걱정 된다고 했습니다. 사실 저는 이 전화를 받고 오히려 가야겠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갈라진 통일 일꾼들을 화합시키는 평화의 메시지, 그것도 예수님의 사랑나라(Love-dom of God)와 그 평화의 메시지를 그 같은 악조건 속에서 전달하는 것이 더 뜻 깊다고 속으로 다짐했기 때문입니다.
    그 곳에서 예상외로 모든 집회들이 은혜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세 번 강연을 했는데 그 내용이 국내 일부 인터넷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오늘 한반도의 상황이 천안함 침몰로 위태로워지고 있었기에 예수님의 <원수사랑> 메시지가 기독교 냉전 세력에게는 아주 불편한 소리로 들렸던 것 같습니다. 특히 북한을 다시 주적으로 몰아붙이는 오늘의 정치 국면에서 주적사랑의 힘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세워가야 한다는 메시지는 냉전 수구세력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스캔들’로, 또는 허튼 감상적 외침으로 여겨진 것 같습니다. 저를 당혹시켰던 것은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크리스천들 중에서 예수님의 원수사랑의 메시지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다는 사실, 그리고 결단코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호전적 신자들이 많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은 당혹을 넘어 저를 슬프게 했습니다. 특히 원수사랑과 주적사랑을 사탄사랑, 마귀사랑으로 대번에 등치시키는 분들 중에는 예수님이 사탄을 사랑하라고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저를 비난 했을 때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 해묵은 오해와 분노를 새삼 확인하면서, 저는 예수님의 메시지, 특히 하나님나라와 그 평화의 메시지가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전통적 종교인들로부터 오해를 받게 되는 사실에 안타까웠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갈릴리 예수님은 외로울 수밖에 없겠다는 처연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의 원수사랑 명령의 참 뜻을 다시 한 번 오늘 우리의 답답한 분단 상황에서 조용히 성찰해 보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비록 실천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말씀이라 하더라도, 예수따르미들은 반드시 그 말씀의 뜻을 올곧게 깨닫고 그 교훈의 가치를 항상 목표로 삼아 끊임없이 몸부림치며 그곳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실천하기 어렵다고 그 높은 뜻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따르미로 자처한다면, 그 뜻을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아 꿋꿋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이 같은 나아감에서 비로소 예수따르미의 올바른 정체성이 더욱 뚜렷하게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의 의미를 오늘의 우리 상황에서 깊게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의 원수사랑 명령이 갖는 뜻을 당시의 상황의 맥락에서 여러 의미있는 각도로 조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5장 43절과 44절, 45절에 주목합시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첫째,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시 유대 율법주의 문화풍토의 배경에서 보면 엄청난 대안적 비전에서 나온 말씀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전통에 따른다면 이웃이나 동맹세력은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원수는 미워해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같은 전통에 충실한 한 평화는 영원히 올 수 없음을 확신하셨던 갈릴리 예수님은 그 전통을 뛰어넘었습니다. 나아가 본질적 대안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웃사랑, 형제사랑, 친구사랑 등은 너무나 진부하게 당연한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 진부한 일상성을 뛰어 넘어 마땅히 증오해야 한다고 믿었던 원수를 오히려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일종의 청천병력 같은 대안을 제시한 셈이지요. 원수사랑 없이 참 평화는 세워지지 않는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지요. 마태복음 5장 9절에서 예수님은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게 된다고 선언하셨는데, 5장 45절에는 원수사랑 행위가 바로 평화 만들기 실천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임을 새삼 다시 확인 시켜줍니다. 복 중 가장 큰 복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이라면, 이 큰 복은 원수사랑을 통한 평화세우기를 통해 비로소 이루어짐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습니다. 여하튼 이 명령은 아무리 힘든 것이라 하더라도 “혁명적인” 대안의 메시지이기에 우리가 항상 쳐다보며 나아가야 할 삶의 궁극적 목적이요 더불어 평화로운 삶의 아름다운 목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9절과 5장 45절은 반드시 함께 읽고, 해석하고 실천해야합니다.

    둘째, 우리는 예수님 때나 지금이나 일상적으로 원수를 보복의 대상으로 못 박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원수사랑 메시지의 깊은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합니다. 원수가 주적이라고 인식될 때는 반드시 크게 보복해야 하며, 그 보복은 정의의 이름으로 정당화 된다고 쉽게 믿습니다. 과연 예수님이 정의의 미명 아래 이뤄지는 보복을 권장하셨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첫 설교, 곧 그의 취임사로 인식되는 첫 설교에서 발견되는 흥미로운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대단히 의미심장한 갈릴리 예수님의 속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그의 고향 나사렛에 돌아와 (사탄의 세 가지 시험을 성령으로 극복하신 후) 안식일 날 회당에서 이사야 61장 1-2절을 의도적으로 찾아 읽으셨습니다. 이 말씀을 중심으로 그는 간결한 취임사를 선포하셨지요. 그런데 이사야 예언자의 메시지 중 딱 한 가지 표현을 짐짓 빠트렸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라는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곧 사랑지배질서에서는 하나님의 보복이라 할지라도 보복행위는 설자리가 없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새 질서는 보복을 통해 세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랑의 힘, 곧 가난한 자, 눌린 자, 못 보는 자, 포로 된 자 등 처절한 세속의 경쟁에서 억울하게 탈락된 꼴찌들을 더욱 사랑하는 힘으로만 하나님 나라는 이뤄지는 것입니다. 원수와 주적은 증오하고 그들에게 보복적 응징을 가함으로써 하나님의 평화는 이뤄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비록 갈릴리 예수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예수님의 이 뜻과 그 마음을 올곧게 헤아려 다음과 같이 힘 있게 권고 했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롬12:20)

    바울은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는 신명기 말씀(신32:35)을 바로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예수님은 이 신명기 말씀에 대해서도 다르게 해석 하실 것으로 저는 흐뭇하게 상상해 봅니다. ‘신명기는 그렇게 말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원수 특히 주적을 사랑으로 변화시켜라.’ 라고 원수를 변화시키기 위해 무력이나 폭력을 비록 정의의 이름으로 활용한다 해도 그것은 결단코 아바(Abba)하나님의 평화를 세우지 못합니다. 오히려 증오와 폭력은 원수 속에 있는 악을 부글부글 끓어오르게 할 것입니다. 또한 내 속의 폭력적 성향도 강화 될 것입니다. 보십시오. 정의의 이름으로 이라크를 거침없이 침공했던 부시 대통령은 결코 중동의 평화를 세울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전쟁과 증오를 더욱 부추겼습니다.

    세째로,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하고 심각한 질문 앞에 진솔하고 경건하게 마주서야 합니다. 과연 우리의 원수와 주적은 자동적으로 악인가? 자동적으로 그들은 사탄이 되는 것인가? 교회를 오래 다닐수록, 교회교리에 익숙해질수록, 우리의 원수는 바로 우리에게 마귀와 사탄 같은 악의 세력이 된다고 쉽게 확신하게 됩니다. 과연 이런 관습적 신앙이 예수의 마음을 올곧게 반영하는 것일까요? 이 같은 통속적 신앙은 일종의 독선적 신앙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내 원수가 악한 존재라고 믿을수록 우리자신들은 바로 선한 존재라는 독선적 자기 인식이 우리 속에 굳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광신 할수록 악의 화신인 원수를 더욱 철저히 박살내야 한다는 집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것은 일종의 부끄러운 착각이면서 위험한 광기일수 있습니다. 가장 위협적인 독선이기도 합니다. 사탄의 본질은 바로 이 같은 독선적 광신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우리는 지선(至善)이요 원수는 지악(至惡)이라는 확신 그 자체가 악과 악순환을 조장하는 악마적 힘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 같은 독선에 우리가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주셨습니다(마태7:1-5). 남의 작은 결점(남의 눈 속에 있는 티) 보다 자기 속에 있는 심각한 결점(내 눈 속에 있는 들보)에 더 주목하라고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놀라운 사회심리학적 의미와 지혜를 갖고 있습니다. 남의 작은 결점 보기기전에 자기의 더 큰 결점에 주목하고 그것을 깊이 성찰 하는 능력을 가출수록 인격적 품위를 지니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연히 남 앞에 자기를 낮출 수밖에 없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겸허하게 남을 대할 수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렇게 한다면, 두 존재는 비로소 사람다운 인격적 존재로 거듭나고 평화스러운 관계를 형성 할 수 있습니다. 한자의 사람(人)은 바로 서로 자기를 겸손하게 낮추는 두 존재 간의 신뢰관계를 나타냅니다. 즉 평화의 관계를 표상합니다.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당부는 바로 이 같은 인간간의 본질적 평화관계를 세우라는 권고입니다. 남을 즉각 악이라든지 사탄으로 낙인찍는 행위야 말로 부메랑(boomerang)이 되어 남으로부터 자기를 향해 화살처럼 아프게 날아오게 한다는 진리를 예수님께서는 설파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악순환입니다. 이 같은 악순환이야말로 평화를 깨뜨립니다. 그러기에 남의 부족한 점을 볼 때 마다 우리의 영적 시선은 항상 우리 속에 있는 더 부족한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속의 부족한 점을 먼저 변화시키려고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만 상대방의 부족한 점도 변화시킬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마침내 선순환이 두 존재 사이에서 작동하게 됩니다. 이 같은 선순환은 바로 평화를 세우는 힘이요 평화를 키워내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원수를 미워할 때마다, 그 원수는 악이기에 마땅히 제거되어야 하고, 마땅히 심판받아 소멸되어야 한다고 속단하기 쉽습니다. 게다가 이 원수가 주적일 때 그것은 100% 악마적이요, 우리는 당연히 옳고 선하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사실 현실에서 100% 악한 존재도, 100% 선한 존재도 없습니다. 남 속에서, 원수 속에서 악한 것을 크게 부각시키려는 우리의 마음이야말로 더 심각한 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원수를 포함하여 모두는 선과 악을 우리 속에 다 함께 지니고 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선악의 혼재는 항상 현실입니다. 이런 뜻에서 보면 예수님의 상황판단은 매우 현실적인 지혜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평화 만들기 처방은 그만큼 현실적 설득력을 지닙니다. 남의 결함을 보기에 앞서 내 결함을 먼저 볼 수 있는 사람, 원수의 결점 볼 때마다 동시에 우리 속의 결점을 보고 부끄러워 할 수 있는 사람, 주적의 악을 확인할 때마다, 동시에 우리 속에 있는 독선과 교만과 탐욕의 악도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최고의 품격을 지닌 존재 곧 영적 존재입니다. 이 같은 영의 존재로 끊임없이 나아가려는 사람들이 바로 올곧은 예수따르미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이야말로 바로 우리의 주적 속에 있는 악과 우리 안에 있는 악한 것을 모두 내려놓고 비워냄으로써 하나님 평화를 세우라는 명령입니다. 주적을 더욱 사랑함으로써 주적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변화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長空(김재준 목사님)이 말년에 즐겨 써주신 붓글씨 중에 애자무적(愛者無敵)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원수사랑으로 원수를 없앨 수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주적 사랑으로 마침내 주적을 없게 할 수 있습니다. 참사랑은 미워할 대상을 근원적으로 없애는 힘이지요. 그리하여 평화를 근원적으로 있게 할 수 있지요. 이것이 바로 갈릴리 예수의 가르침이라 하겠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 다른 집단, 다른 정치체제 속에 있다고 믿는 악한 것만 주목하여 그들을 증오하고 다투면서 피 흘리는 일을 주저하지 않을 때, 바로 그 상대방 속의 악은 더욱 악랄하게 그 영향력을 키우게 된다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 속의 악의 힘 또한 흉측하게 더욱 커진다는 진리를 더욱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세상 사람을, 특히 정치세력은 이 같은 악순환 속에서 목을 걸고 자기들의 이익을 도모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하거나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십자가 처형으로 몰아갔던 로마제국의 권력과 예루살렘 성전권력(로마권력의 하수인이었던)의 제도 폭력 앞에서 사랑의 힘을 몸소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는 로마식 칼의 힘에 결코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힘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우아하게 감당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부활하신 것입니다. 사랑의 힘으로 칼의 힘을 이길 수 있음을 아바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힘있게 보여 주셨습니다. 초대 교회는 바로 이 사랑의 폭발적 힘 곧 부활의 힘으로 세워졌습니다. 오늘의 기독교는 바로 이 힘에서 흘러나온 제도라 하겠습니다. 바로 오늘의 기독교 안에서, 오늘의 제도 교회 안에서 이 사랑의 힘을 모멸하거나 희화하는 기독교 신자들이 늘고 있다는 사실이 저를 비참하게 만듭니다.

    네째로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당부하셨을 때 제자들 중에는 이 메시지를 아주 못 마땅하게 생각했던 제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들 중에는 당시 로마제국의 폭력적 지배에 대해 칼의 힘으로 저항하고 싸워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열심당에 동조하는 사람들이었지요. 이들은 예수님의 원수사랑 명령을 현실성 없는 순진한 낭만적 대안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예수님 곁에 기특하게도 용기 있게 남아 있었던 베드로가 칼을 지니고 있었던 것 보면, 비록 그가 시몬 같은 열심당원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운동에 동조했던 “혁명적 민족주의자”일 수도 있겠습니다. 마르고의 귀를 베었던 그 용기를 보면, 스승을 보호하고 민족 해방을 열망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허나 예수님의 선택은 아주 뚜렷했고, 바위같이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폭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바른 가치는 하나도 없음을 깨우쳐 주셨지요. 증오로 성취될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장엄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오히려 칼 쓰는 자는 칼로 망할 뿐입니다. 칼과 증오의 힘으로 원수와 주적을 궤멸시킨다하여 그곳에 참 평화가 세워질 수 없음을 엄숙하게 선포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적어도 부활의 능력을 믿는 예수따르미라면, 원수사랑의 명령을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습니다. 원수의 악과 우리의 악을 모두 마침내 이길 수 있게 하는 힘은 사랑에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본질이요 하나님의 힘입니다. 그 힘은 그의 아들 예수가 이 시간과 역사 속에서 이룩하려고 애 썼던 하나님 나라의 힘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실천을 통해 우리들은 하나님을 직접 체험 할 수 있지요. 그리고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따르미의 특권이지요.

    최근 저는 일부 한국크리스천들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북한을 주적으로 확신하는 신자들이 예수의 원수사랑을 통한 한반도 평화 만들기를 강조하는 저를 여러 시각에서 인터넷 댓글을 통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마치 제가 공의와 정의가 없는 사랑만을 허황되게 강조하는 철없는 이상주의자로 보는 듯합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공의가 없는 사랑을 낭만적으로 소리 높여 강조했다고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보여주신 사랑실천 속에는 이미 정의가 깊이 녹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의는 보복을 정당화시키는 응징적 정의(retributive justice)는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를 비워 남에게 선한 것으로 채워주시는 비움과 나눔의 정의(distributive justice)입니다. 그러기에 나눔의 정의는 항상 감동을 자아냅니다. 응징적 정의는 대체로 증오의 악순환을 작동시키지만, 나눔의 정의는 항상 겸손과 감사와 감탄과 감동을 자아내지요. 그리고 평화를 세워나가지요.

    또 다른 비판이 있습니다. 예수의 사랑 메시지는 어디까지나 개인영혼에 관한 말씀이지, 그것이 집단이나 국가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는 비판입니다. 원수사랑의 권면을 개인 영혼에만 적용된다는 신앙은 그것 나름대로 소중한 것이긴 하지만, 이런 신앙만으로는 우리의 역사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을 펼쳐 낼 수 없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길 기도하라고 당부하셨던 예수님을 오히려 슬프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육신이 죽고 난 후에 비로소 들어가는 저 피안의 천당이 아닙니다. 세상권력이 하나님 형상을 지닌 인간들에게 부당한 온갖 고통을 강요하는 구체적 죄악의 상황에서 사랑 실천을 통해 하나님의 평화와 공의를 세우는 일이 바로 갈릴리 예수의 사랑 운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직접 체험 할 수 있는 평화의 새 질서, 공의의 새 질서를 세우는 일이 바로 예수운동이었습니다. 오늘 분단된 우리 상황에서 그 운동은 바로 주적 사랑을 통해 남북이 함께 변화하여 평화를 큰 강물처럼 남북 간에 흐르게 하는 일입니다. 거기에 평화와 공의는 함께 어깨동무하며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공변공영(共變共榮)의 큰 강물과 상승(相勝)과 상생(相生)의 큰 강물이 흐르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의 비판과 오해가 있습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예수의 주적은 사탄이기에 예수님은 그 같은 주적을 사랑하라고 하신 적이 없다는 확신에서 나오는 비판입니다. 다시 말 하지만, 북한은 사탄이요 우리 남한은 천사라는 이분법적 인식은 참으로 잘못 된 근본주의 신앙에서 나온 속단입니다. 북의 지도층이 흑암의 영적 세력 곧 마귀의 세력이라고 확신했던 부시 대통령의 인식과 같은 것입니다. 북한 권력 속에 악한 요소가 있음을 우리가 똑똑히 볼 때마다, 적어도 우리가 예수따르미라면, 우리 속의 악한 요소 곧 독선과 부패와 탐욕도 함께 ‘투명하게 볼 수’ 있는 맑은 영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극복해 내야 할 비극은 상대방 속에 있는 악한 요소들과 우리들 속에 있는 악한 요소들이 서로 미워하면서도 기이하게도 서로의 악한 힘을 결과적으로 북돋워주고 있다는 역설적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악한 요소들은 항상 결과적으로 서로 도우고 있습니다. 북의 강경 군부는 남의 강경수구세력을 그들의 의도와 달리 결과적으로 도우면서 남북 간의 악순환을 더욱 악화 시켜 나갑니다. 그 반대도 사실이지요. 이것이 바로 적대적 상조관계입니다. 남북 간에 이 같은 적대적 상조관계가 더욱 강화 될수록 남북 간 평화는 더욱 멀어지고 남북 각 체제 속에서 인권과 정의와 민주주의는 그만큼 더 후퇴하게 됩니다. 그만큼 민족의 고통과 민중의 고난은 커지게 됩니다.

    이 같은 비극을 이겨내는 힘은 서로 상대방의 결점을 볼 때마다 자기 속의 더 큰 결점을 더 투명하게 볼 수 있는 밝고 맑은 영의 시력에서 나옵니다. 서로를 향해 더욱 겸손하게 자기 몸과 마음을 낮추면서 나눔의 공의를 이룩하려고 애 쓸 때 이 비극은 비로소 극복될 수 있습니다. 나눔의 정의는 보복심에서는 결코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비움의 결단과 실천, 곧 사랑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의 삭막한 분단 현실에서 갈릴리 예수의 육성이 더욱 절박하게 그리워집니다. 날로 교묘하게 죄어드는 로마제국의 수탈과 억압 속에서 그리고 그 제국의 하수인으로 처신했던 헤롯권력과 예루살렘의 사제 권력의 억압과 수탈 속에서 신음했던 씨알들에게 원수사랑을 소리 높여 외치셨던 갈릴리 예수님이 더욱 절박하게 그리워집니다. 잔인했던 로마의 지배아래 얼듯 듣기에 헛소리처럼 들렸던 예수님의 사랑 외침이 날로 각박해지고 살벌해 지는 우리의 분단대결 상황 속에서 더욱 절박하게 저의 가슴에 저며 오는 듯합니다. 그 외침은 허공에 맥없이 사라질 헛소리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외침은 60여 년 간 우리 민족끼리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보복하면서 증오의 대결을 해 온 우리의 어리석은 짓을 이겨 낼 수 있게 하는 새 역사의 외침이요 복음의 힘찬 외침이라고 믿습니다. 이 믿음이 청와대 안에서나 밖에서나 적어도 크리스천으로 자처하는 정치인들 속에서 먼저 굳세게 작동하게 되길 저는 간절히 기도합니다. 특별히 예수교장로이신 이대통령이 한반도 평화를 더욱 어렵게 하면서 우리민족의 역사를 더 이상 후퇴시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가 예수의 사랑나라 운동을 이해하여 분단된 이 땅에 평화와 공의의 큰 강물을 흐르게 하는 대통령으로 기억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 sd.seoul 137.***.20.103

      “.. 사실 현실에서 100% 악한 존재도, 100% 선한 존재도 없습니다. 남 속에서, 원수 속에서 악한 것을 크게 부각시키려는 우리의 마음이야말로 더 심각한 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좋은 아침에 좋은 말씀 읽게 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 ewrq 76.***.38.156

      비슷하게 이해가 쉽지 않은 말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는 말이 있습니다.

      제 생각을 덧붙이자면, “영적전쟁”을 이해하고 그 관점에서 보아야 이 말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될수있다는 생각입니다.

      이세상에 “선하고 거룩한” 분은 오직한분,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100% 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마저도 복음서 어디선가, 정말 선한분은 하나님밖에 안계시다고 고백한적이 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주적입니다. 100% 악입니다. 그러나 사탄도 하나님권세에 속하여 있습니다 (욥기).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을 조종합니다. 김정일의 마음도, 부쉬의 마음도, 오바마의 마음도, ….그리고 내 마음도 사탄이 때때로 조종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원죄, 원래가진 이기적인 죄성 때문입니다.

      “빛과 어두움의 영적전쟁 (릭 조이너?)”이라는 책에 보면, 이 영적전쟁하에서 사탄이 인간을 조종하는 방법을, “3마리의 마귀가 각각 한 영혼의 어깨와 머리에 올라타고 조종”하는 이미지로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전쟁에서 기도의 화살을 쏨은, 그 영혼을 타고있는 마귀들을 겨눈것이어야지, 그 영혼을 마귀로 보고 우리의 형제인 영혼을 쏘는 실수를 저지르면 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도 이해가 됩니다.

      계시록에서 보면, 두 마리의 짐승들, 즉 적 그리스도가 묘사되어있습니다. 이 짐승도 사탄이 일으켜세운것이고 사탄이 그 권세와 능력을 부어준것입니다. 이 짐승도 어쩌면 우리처럼 유혹에 빠지기 쉬운 한 영혼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시스템일수도 있겠지만, 그 시스템을 주도하는 인물일거라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정치인들이나 재벌들을 보세요. 그들이 가난하던 시절과 권력과 금권력을 쥐면 어떻게 변화되는지.

      그리고 계시록 13장에서 사탄의 정체에 대해서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아담과 이브를 꼬드기던 그 뱀, 그리고 드라곤이라고 말입니다. 결국 이 사탄이 창세기부터 현재 그리고 계시록의 예언이 성취되기까지 계속해서 인간의 마음을 통제 조종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조종방법은 아주 쉽습니다. 돈…파워…욕심 (전 개인적으로 왜 섹스의 유혹은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할때 분명히 묘사가 안되어있는지 궁금해요, 헤헤….., 어쨌든 예수님을 시험하던 그 방법을 모든 영혼들에게 다 유혹하는 것이고, 예수님말고는 다 쉽게 넘어갈수 밖에 없어요. 그러니 이 연약한 인간은 사랑받아야하고 보혈의 피를 덧입지 않으면 안될존재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6장인가에서 분명히 이야기 하지요. 두 주인을 섬길수 없다. 하나님과 돈. 하나님과 뱅커라고도 합니다. 뱅커(아마 시스템), 돈은 계시록13:17에서 적그리스도와 바로 직결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적은 우리를 핍박하고 힘들게 하는 다른 영혼들이 아니고, 그 영혼을 타고 조종하는 사탄 마귀입니다. (역시 계시록을 보면, 우리 예수님편에 선 천사들도 셀수 없이 많지만, 사탄의 졸개 마귀들도 셀수 없이 많습니다) 우리가 원수(영혼)를 사랑해야 하는 까닭은, 그 영혼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구원받아야할, 저희 형제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원수는 사탄입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를 힘들게 하고, 억울하게 하는 다른 영혼들에게 사랑의 마음과 용서의 마음을 품는것은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게 왜 그리도 중요한지, 예수님은 짧은 기도문에도 그 원수같은 영혼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쳐줍니다. “내가 그를 용서해준것처럼, 하나님도 내 죄를 용서해주소서…”

      • ewrq 76.***.38.156

        그렇다면 사탄의 유혹하는 “화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아닌, “You Can do it” 입니다.

        “너 그 선악과 먹어도 돼? 왜 안되는데? 너 할수 있어!”
        “너 그 권력 가질수 있어, 넌 충분한 능력이 있어!”
        “너 충분히 부자될수 있어, 돈 벌수 있다니까. 넌 할수 있어!”
        “너는 자유해. 하나님으로부터마저도 말이야. 그 자유를 누려봐. 어때 재밌지? 으하하하”
        “할수 있다니까. 안되면 (네영혼을 내게 팔어.) 내가 그렇게 할수 있게 도와줄께”

        여러분 마음속에 “Yes I can” 이 메아리칠때 조심하십시오. 사단의 화법일수 있습니다.
        내가 다 할수 있는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나를 통하여 다 하실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쏙빼고, 네가 다할수 있다라고 말하는 종교지도자들 정말로 주의하세요.

        • tracer 198.***.38.59

          사단의 화법일 수 있다고 하셨는데요, 그러면 건전한 자신감과 사탄의 속삭임을 어떻게 구분하면 됩니까?

          • ewrq 76.***.38.156

            인간이 원래 의롭지못한, 건전하지 못한 존재인데,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건전한 자신감이 어디에 있습니까. 부질 없습니다. 거꾸로 하나님이 우선하거나 동의하실거같으면 건전한 자신감이 될수 있고요. 믿는 사람의 사고가 그렇다는 것이지 트레이서님이 이 사고를 받아들이라는 뜻은 아니고, 크리스천들을 이해하는 하나의 관점입니다. (예수님이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셨으니, 내손잡고 인도하시는 그 길이 승리의 길임을 믿는것입니다. 그 길을 어떻게 아냐구요? 그래서 크리스천들이 기도를 하쟎아요. 구하려고.)

            원래 믿는 사람들은 이중법으로 사고가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빛과 어둠. 예수냐 사단이냐. 회색지대는 없습니다.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들락날락하는 주변인들의 행동은 가능해도.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숨듯이.

            • tracer 198.***.38.59

              기도의 응답이 하나님의 것인지 사탄의 것인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 ewrq 76.***.78.114

              어렵게 생각할 수 있지만….그거야 간단하지요.
              하나님께 기도해서 받았으면 하나님이 응답주신거고, 사탄한테 기도해서 받았으면 보통은 사탄한테 받은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사탄한테 기도하려면 사탄과 먼저 딜을 해야 하구요. 하나님께 기도하려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구요. 근데, 질문을 가만 생각해보면,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사탄이 중간에 와서 훼방을 놓거나 더좋은거 주겠다고 유혹할 수도 있겠네요. 그러니 무엇을 어떤마음으로 기도하는것도 하나님이 중요하게 보시겠네요. 악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사단의 유혹에 꼬이기가 아주 쉬울테니.

              하나님은 선하신 분입니다. 악을 선으로 바꿀 수 있으신. 사탄숭배자가 하나님을 경배할수 있거나,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가 사탄을 숭배할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세요? 노 노.

    • tracer 198.***.38.59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확실히 신약에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가치관과 철학은 당대에 도덕적으로 굉장히 앞서가는 것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당시 유대 율법주의 문화풍토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굉장히 파격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문화풍토를 자리잡게 한 율법을 내리신 분은 다름아닌 하느님인 것이 저에게는 흥미롭습니다. 예수님 가르침의 특별함을 강조하는 것은 좋은데 예수님은 사실 자기 자신이(삼위일체론에 의해) 전에 내린 율법에모순되는 가르침을 하고 계신 것이지요.

      하느님이 실수하셨다고 깨달으시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올바른 가르침을 내려주신 것일까요?

      • ewrq 76.***.38.156

        트레이서님의 질문에 예수님이 정확하게 답변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줄 아느냐. 아니다 오히려 완성하러 왔느니라”

        마태복음인가 어딘가에 있는 말씀입니다…왜 이말씀을 하셨는지, 더 궁금하시면 트레이서님 주위의 다른 믿는 분들과 이야기 나누어 보세요. 저는 이만.

        • tracer 198.***.38.59

          그러니까 구약의 율법, 예수님 자신이 야훼로서 내리신 율법이 ‘불완전’했다는 말씀이신 거지요?

          • ewrq 76.***.78.114

            율법이 불완전한게 아니라, 그것을 받은 인간이 불완전한거지요. 불완전한 인간의 구원을, 사랑을 통하여 완성하러 오셨다는 의미일겁니다. 로마서 한번 쭉 읽어보시기 권합니다.

            • tracer 198.***.38.59

              산상수훈을 읽어보시면 예수님이 많은 부분 구약의 율법에서 명령하는 것과 반대되는 가르침을 내려주십니다. 그리하시고 나서 율법을 ‘완성’하시는 것이라 말씀하셨지요. 즉, 구약의 많은 율법들과 다른 생각을 하고 계시다는 건데, 삼위일체에 따르면 예수님은 곧 야훼시니 스스로 내렸던 율법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자인하시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 ewrq 76.***.78.114

              하여간 로마서 읽어보세요. 율법에 대해서 바울사도가 자세히 풀이해주십니다.

      • roundone 69.***.73.54

        Tracer 님,

        “그 문화풍토를 자리잡게 한 율법을 내리신 분은 다름아닌 하느님인 것… … 예수님은 사실 자기 자신이(삼위일체론에 의해) 전에 내린 율법에모순되는 가르침을 하고 계신 것이지요… … 하느님이 실수하셨다고 깨달으시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올바른 가르침을 내려주신 것일까요?”

        => 너무 나가신것 같습니다. 이건 님만의 생각이시지요? 혹시 기독교 도그마의 모순을 지적하시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데요, 조금 위험하다고 봅니다.

        물론 오랜 전통이 되어온 그 도그마의 결함들은 어렵지않게 찾아볼 수 있지요. 구약과 신약이 서로 연결되지 않은 부분을 구차한 설명으로 짜집기 하려는 솔직하지 못한 기독교의 문제가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지요.

        그러나 종교를 너머로 예수께서 하시고자 하셨던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신다면, 이런 교리로부터 오는 모순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 tracer 198.***.38.59

          모순이 된다고 말하시는 종교적 초자연적인 주장들은 털어내버리고 예수님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면 교리로부터 오는 모순들을 극복할 필요조차 없을텐데요.

          그리고 너무 나가셨다고 했는데, 어떤 선을 넘어섰다는 말씀이신지요? 또 뭐가 어떻게위험하다고 생각하시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 roundone 68.***.212.99

            모순들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예수님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 갈 수 있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항상 님께서 제기하시는 이슈들이 바로 극복하려는 노력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남이 건네준 이야기들을 무조건 믿기보다는 끊임없는 의심과 탐구속에 바로 예수님과 하나님께서 계시다고 저는 믿거든요. 그렇지 못하게 하는것이 바로 종교가 아닐까 하네요.

            사람들은 특히 종교에 관하여 주장할때 많은경우 공통점들이 보이네요. 즉, 내가 한 말이 바로 절대진리 라는태도로 단정적 이지요. 그럴때마다 Tracer 님께서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는 방식으로 반문하여 오셨지요. 제가 님의 반문에 동감할때가 많이 있답니다.

            그러나 위에 제가 인용한 님의 댓글들이 바로 이번엔 님께서 오히려 단정짖고 말씀하신것 같아 지적한 것입니다. 그건 님의 방식이 아니기때문이었지요. 독재정권에 맞서 항거한 사람들이 나중에 정권잡을때 그들을 향하여 ‘욕하면서 배운다’ 라고 얘기하기도 하지요.

            님께서 다소 비난조로 말씀하신 것으로 받아들여졌답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가모순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되요. 특히 모두가 예수님, 하나님 을 외치지만, 결국은 나만의 예수님, 우리만의 방식의 하나님, 즉, 집단이기주의를 보이는 경우가 많이 있지요. 님은 그런 방향으로 안가시리라 노파심으로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말꼬리 잡으려는 것은 전혀 아니예요.

            • tracer 198.***.38.59

              roundone님과의 대화는 항상 유익하며 님이 보여주시는 자세로부터 제가 배우는 점이 많습니다. 그점 일단 감사드립니다.

              아직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가 율법과 상반되는 가르침을 내리신 예수님에 대한 지적이 근거없는 확신으로 들린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니면 그 tone이 비아냥 거리는 것으로 들렸다는 말씀이신지요.

            • roundone 68.***.212.99

              님께서 말씀하시려는 의도는 당연히 이해되지요. 그러나 그 tone 이 제겐 부정적으로 들렸습니다. 어쩌면 님께서는 토론에 많이 익숙하셔서 그러신 건지도 모르지요. 오히려 님에게 공격해대시는 많은 분들이 도를 더 넘으신 경우가 많이있지요, especially in the Name of God!

              님께서는 자신이 Atheist 라고 당당히 말씀하시는 모습은 언제나 좋아 보입니다. (최소한 저한테는요.) 많은 사람들은 의심이 들어도 의심난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없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답니다.

    • 기독교 72.***.88.170

      tracer님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신이 존재한다고 믿으시나요?
      Yes or No.

      • tracer 198.***.38.59

        no입니다.

        • 기독교 72.***.88.170

          인격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곧 기독교의 대전제를 부정하는 겁니다.
          기독교의 모든 것들이 이 대전제 위에 구축되어 있는거지요.

          그러므로 이 대전제를 부정하면 나머지 것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고 언급할 필요조차 없지요.

          참 시간 많아 보이는군요..
          저기 밑에 “꼴통버스터”라는 분이 쓴 코멘트에 공감이 갑니다.

          • tracer 198.***.38.59

            서로 말을 섞지 않는다고해서 신을 믿는 사람들과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세상에 사는 것은 아니지요. 꼴통버스터라는 분의 코멘트에 제가 단 답글을보셨는지요. 저도 말하자면 전도, 혹은 캠페인 하고 있는겁니다.

            • ewrq 76.***.78.114

              근데 트레이서님, 무슨 일하시는 분인지 정말 대단하십니다.

              직장생활하시랴 애들과 놀아주시랴 와이프 비위맞추시랴 바쁘실텐데, 또 이렇게 Athiest 전도까지 열심이시네요. 저는 그냥 심심해서 댓글다는 정도인데…. 보시면 아시지만, 트레이서님이 항상 공격형 질문하시고 저희는 항상 방어적이고…

              어쨌든 트레이서님도 전에 교회다니신 분이신듯한 데, 어쩌면 저렇게 성경을 지식으로만 아시고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느끼지 못하셨을까 하는 의아함이 있읍니다. 뭐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유지하다가 교회를 떠나셨다면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만, 트레이서님은 그런게 안느껴집니다.

            • tracer 198.***.38.59

              공격적으로 들리셨다면 유감입니다만, 저는 너무나 자신에 찬 확신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종교인들에게 어떤 근거로 그렇게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주장을 하는지 물어보고 있을 따름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것이주관적, 개인적 감정적 근거 외에는 뒷받침하는 근거가 없다고 보이거든요. 주관적 감정적 근거를 가지고 객관적, 보편타당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은 틀리다고 생각합니다.

              글쎄요, 저도 의아하네요, 왜 저는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고 기도하고 믿으려 노력했는데도 예수님과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느끼지 못했을까요? 제가 제대로 기도를 안하고 충분한 노력을 안해서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어떤 이유로 저를 무신론자로 만드셨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님께서 생각하는 인격적인 관계가 단지 자신의 내면에서 형성된 믿음이기 때문일까요?

            • roundone 68.***.212.99

              위에 트레이서님께 댓글드렸는데, 저는 ewrq 님과 전혀 다른 생각이네요. 어떻게하면 저도 트레이서 님과같이 끊임없이 의심하고, 끊임없이 반문할 수 있을까 합니다.

              성공회 스퐁주교의 말씀과같이 머리로 이해안되는 것은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거창한 얘기같지만, 바로 트레이서 님과같은 태도가 바로 진정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라 생각되네요. 그리고 그런 추구 하나하나의 과정속에 바로 하나님이 계시다고 저는 생각되네요.

            • ewrq 76.***.78.114

              머리에 의존한 이해에 대해서 빌리그래함 목사가 인상깊은 말씀을 남겼는데, 생각이 안나네요.

              저도 전에는 roundone 님처럼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만, 이제는 아닙니다. 세상일들이 꼭 머리로 이해를 할수 있는것도 아니고, 그래야할 필요가 있는것도 아닙니다. 가슴으로 퍽 날아오는 것도 있습니다. 영적인 부분들이 좀 그렇습니다. 머리로 이해하는것과는 다릅니다. 저같은 경우는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머리가 어느정도 거세되어졌다고나 할까. 물론 이성적 논리체계는 여전히 그대로 작동하는데 그 근본논리의 중심이 바뀌어져서 이성이 작동합니다. (자연법칙 중심의 이성체계에서 하나님중심의 이성체계라고나 할까)

              “보편적” 진리라는게 어떤 의미로 쓰신건지 잘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절대적 진리이고 불변의 진리입니다. 적어도 믿는 사람은 그렇게 믿으며 나아갑니다. 믿음은 현상을 보는데서는 생기지 않습니다. 그 현상의 배후를 보려는 데에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면 아마 믿음이 생길 이유도 없지 않을까요.

            • ewrq 76.***.78.114

              그냥 재미로 트레이서님께 물어볼께요. 전에 제가 많이 가졌던 의문중 한가지입니다;

              왜 중력법칙은 “inverse square law”로 작동하게 되어있을까요? 왜 거리의 3제곱이나 1.5제곱이나 이런게 아니고, 하필이면 2제곱의 반비례일까요?

            • 기독교 72.***.88.170

              다른 의미의 전도를 하고 계신다?

              하지만
              꼴통버스터 라는 분의 코멘트에도 함축되었듯이
              귀하는 필요한 인텔리젼트가 조금은 결여된듯 합니다.

              서로 같은 세상에 산다고 해서 설득력 없는 고집을 들어줘야할 숭고한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지요. 시간 낭비지요.

              가끔씩 심하다 싶으면 잽 날리러 다시 들어오지요. good luck!

            • 다생 76.***.80.230

              왜 어떤 종교인들은, 그 종교에 대한 정당한 의문을 가지는 것에, 답을 하지 못하면서 왜 이런 인신공격으로 말을 끝내는 걸까요?

              인텔리젼트가 결여되서, 시간 낭비다.. 잽을 날린다..
              (그냥 입닥치고 믿어라????)

              예수님이 그렇게 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는데요. 오히려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었던가요?

              어쩜 님이 안티 크리스찬 일지도..

            • tracer 198.***.38.59

              저의 지성이 부족한 것은 저도 동의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이렇게 공개된 장소에서 대화를 꾸준히 하려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배우려고 하지요. 실제로, 이곳 freetalk에서 배운 것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시간낭비라고 생각하시면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곳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누구도 의무로 들어야 하는 그런 것은 없다고 생각하네요.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귀를 기울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흘려넘기면 되겠지요. 하지만, 설득력이 없다고 비웃고 조소를 보내는 것은 다른 이야기라는 생각입니다.

              저에게 보여주신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 roundone 69.***.73.54

      eroica 님,

      반갑습니다. 저역시 한완상 님은 제가 많이 존경하는 분들중 한분이십니다. 그리고 서울의 새길교회 (http://www.saegilchurch.or.kr/saegilmain) 라는 곳에 한교수님의 글들이 참 많이 있어서 가금씩 들리곤 하지요. 또한 오강남 교수님의 책 ‘예수는 없다’ 에서 이 새길교회 라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았답니다.

      어떤 Ultra Liberal 신학자 분께서는 새길교회가 귀족교회 라고 비평을 하신적을 들은적 있습니다. 그 교회 나름대로 극복해야하는 점들도 물론 있지만, 그래도 오늘날 이만한 교회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직 한국의 기독교의 미래가 그리 어둡지만 않다는 생각을 들게하네요.

      교회얘기로 흘렀네요. 한완상님께서 몇년전 ‘Passion of Christ’ 라는 영화를 보신 후, 간단한 소감을 말하신 적이 있었는데요, 한교수님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서 예수께서 받으신 끔직한 육체적 고통에만 감성적으로 집중한다고 하시며, 그 고통속의 예수의 진정한 고민은 과연 무었이었을까 하는것에 대하여 치열히 고민해봐야 한다고 하신 말씀이 오늘 eroica 님께서 올려주신 한교수님의 글을 대하니 문득 떠오르네요.

      • eroica 98.***.187.97

        roundone님, 저도 오랜만에 이곳에서 만나뵙게되어 반갑습니다. 저도 우연히 알게된 새길교회 웹사이트에서 한완상교수님을 그나마 자주 뵐 수있어서 무척 반가워했었지요….

    • tracer 198.***.38.59

      ewrq님/

      왜 중력법칙은 “inverse square law”로 작동하게 되어있을까요? 왜 거리의 3제곱이나 1.5제곱이나 이런게 아니고, 하필이면 2제곱의 반비례일까요?

      –> 중력법칙이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가 사는 이 우주는 존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우리도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겠지요. 우리는 중력법칙과 다른 물리학적 법칙들이 지금 우리가 관찰한 그대로 존재하기 때문에 여기 와 있는 것 아닐까요? 중력 이론과 같은 물리 법칙들은 관찰의 결과인 descriptive law라는 생각입니다. prescriptive가 아니구요. 물론, 세상을 창조한 인격신을 믿으시는 님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이 특별히 fine tune해 준 법칙으로 보인다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 ewrq 75.***.92.218

      솔직히 말해서 이질문은 하나님을 믿기 이전에 내가 가졌던 질문이고, 하나님을 믿고 난 이후엔 이런 질문 내게 해본적이 없습니다.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우주는 아주 특이하게 모든 면에서 파인튜닝되어 있습니다(현대과학이론을 받아들이는 전제하에). 쉽게 말하면, 아이들이 비눗방울 놀이를 할때, 셀수도 없이 여러개의 방울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아니면 날아가다 다 터져버리는데 유독 하나만이 터지지 않고 오랫동안 여기저기 날아다니며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그 비누 방울이 바로 우리 우주입니다. 무슨말인고 하면, 다른 중력법칙을 써서 새로운 우주를 창조하는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면, 스테이블하지가 않습니다. 다 금방 망해버려요. 컴퓨터프로그램으로도 간단히 실험해볼수 있구요. 현재의 과학으로 인류의 진화조건이나 우주의 나이나 이런것들을 현상학적으로는 연구한다고 해도 왜 하필 이 우주에 우리 인류가 그 필요한 만큼의 시간에 진화되어서 현재 우리가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에 답을 주지 못합니다. 그냥 파인 튜닝.(그런데 중력법칙뿐아니라 여러가지 파인튜닝들이 너무 많이 필요해요) 우연. 이런거지요. 그런데 성경은 참 너무 천지창조가 간단히 묘사되어 있어서 제 과학적 배경으로는 성경을 따져본다는거 자체가 너무 싱겁습니다. 제 자신의 과학적 마인드와 성경적 마인드가 서로 토론이 되지가 않는단 말입니다. 사실 제가 성경을 믿게 되기 시작한 이유는 예수님의 “터무니 없는 가르침”이 갑자기 진리로 받아들여진 이유도 있지만, 아담과 이브의 창조에 나타난 심오성을 제가 갑자기 보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과학은 그냥 하나님의 창조법칙을 탐구해서 그것을 인간이 이용하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그 탐구가 어느정도 하나님의 허용하에 있다고 생각하구요. 물론 생명나무에 대한 탐구는 문제가 좀 달라지지만. 크리스천 과학자들은 아마 보통 과학자들과는 그런면에서 과학에 대한 다른 관점을 고민할겁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것이 왜 과학탐구처럼 객관적인 가치를 가져야 하는가요? 과학이나 학문은 객관적인 가치를 중요시 여기지만, 믿음은 주관성입니다. 1대1 하나님의 관계는 지극히 주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와 우리 가족사이의 관계도 정말로 지극히 주관적입니다. 내가 관찰자로서, 객관자로서만 있으면 “안됩니다”. 사랑이 무슨 객관성입니까. 사랑에 대한 학문을 호르몬이나 페르몬이나 뭐 이런걸로 연구한들 나같은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죽음도 그냥 생물학적인 죽음, 부패를 이야기하는 생물학에서의 정의를 이야기한다면, 아주 크게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는것을 이제는 알구요.

      과학도 아주 깊이 들어가면, 더이상 객관화가 가능하지 않게 됩니다. 양자역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원리인, 하이델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바로 객관적인 관찰이 불가능하다는것을 이야기해주는 이론이지 않나요? (이런식으로 말하진 않아도 결국 그런말입니다.) 모르시면 주위의 물리학과 박사한테 물어보세요. 미세한 과학현상에도 주관성이 필연적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인쉬타인이, 아니면 스티븐 호킹이 무신론자냐 아니냐 이런것들은 그들의 지성과는 전혀 무관한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트레이서님의 아이큐나 지성이나 이런것과 영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아이큐 3천인 외계인의 지성과 그들의 영성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오늘날 교육이 마치 객관화가 최고인 가치인양, 과학이 최고의 진리인양 가르치고 있고, 그것을 많은 젊은이들이 그냥 학교에서 받아들이고 있어서, 그런 관점에서 탈피하기 까지는 인생에서 겪는 여러가지 좌충우돌들이 필요한것 같습니다. 그냥 횡설수설. 제 생각이었습니다.

      • tracer 198.***.38.59

        말씀하신대로 종교적 믿음은 주관적이고 감성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그렇지 않아야 한다고 한 적도 없습니다. 단지 그러한 주관적, 감성적, 개인적인 믿음을 기반으로 객관적, 보편적, 과학적 또 절대적인 주장을 하기 때문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종교적 믿음을 자기 개인적인 것으로만 간직한다면 저는 아무런 이의가 없습니다.

        그리고 종교적 관점에서 과연 영성과 지성을 완전히 따로 다루고 있는지도 다시 한 번 뒤돌아보시면 어떨까요? 기독교 교회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부분이 인간 이성, 논리와의 관계에 할애되었는지 말이지요. 어쩔 때는 과학과 이성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하면서 다른 때에는 영성과 이성은 무관하다고 하는 것이 일관적이지 않다는 생각이네요.

        • 꼴통버스터 108.***.197.156

          꼴통아..

          여러 사람들 어설픈 말들때문에
          오히려 네가 더 똑똑해 보이는구나.

          정말 궁금한게 있으면
          공부를 하렴.

          제대로 된 신학서적은 읽기 싫고
          책 몇 권 읽고
          남의 댓글 물고늘어지고
          설령 이겨본들 무슨 소용이니?

          그게 너를 한단계 위로 올리지는 못한다.

          그리고 누가 종교적 믿음이 주관적 감정적 개인적이라고 하니?
          네가 그렇게 믿고 싶은거겠지.

          내 말했지?
          그냥 나는 안믿는다
          나는 너와 다르다
          라고 말하면 될걸,

          너는 틀렸다
          라고 말하려고 발악을 하니 맨날 그모양이야.
          왜냐하면 그러면서 설득력이 있으려면
          네 머리가 좋거나 공부를 제대로 했어야 하는데
          너는 둘 중에 어느 것도 아닌 것 같거든.

          잘 살아야 해!

          꼴통아..

          • 이야 66.***.107.140

            요 떠라이 개독쉐키 보게..

            신학서적 중에 ‘제대로’ 된 신학서적이 어떤게 있는지 올려바라 개새키야. 내 생전 그딴건 듣도 보도 못했다.

            ‘신학’ 이라는것 자체가 구라구만 뭔 개소리???

          • tracer 198.***.38.59

            역시 저에게 끊임없이 보여주시는 관심 감사히 받겠습니다.
            잘 살께요. :)

            • 꼴통버스터 108.***.197.156

              기독환자은 스스로 전도한다고 하고,
              너는 그 기독환자에게 전도한다고 했던가?
              그럼 나는 너와 환자 모두에게 전도한다고 보면된다.

              사실은..
              전도라는 말보다
              “계몽”이라는 말을 좋아해.

              잘 살겠다고 다짐했으니
              부디 무지몽매에서 벗어나도록 하시게.

              꼴통아..

          • 이해안가 98.***.227.197

            그 동안 free talk에서 비속어 사용한다고 비평이 많았습니다. 결국은 이 사람들을 politics라는 독립게시판을 만들어서 내 쫓았습니다.

            골통버스터라는 사람은 제목부터 비속어에 원글은 전부 반말에 정말 수준이하입니다. 그런데, 비판의 글이 전혀 없습니다. 아니, 옹호의 글이 달립니다. 비속어 사용금지에 대한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골통버스터, 한글 맞춤법도 정확하고 그 어려운 띄어쓰기도 잘하고, 보아하니 글께나 쓰는 넘 같은데 태도가 정말 싸가지다. 올린 글도 아무리 맘에 안들어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라.

        • ewrq 75.***.92.218

          주관적이고 감성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이라는것도 맞습니다. 그리고 또 절대적 진리이고 불변의 진리임을 믿구요.

          그런데 솔직히 내가 예수님믿는것이, 객관성/보편성/과학성을 가져야하고 이것을 믿지 않는사람들에게 증명해야하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저와 제 아들과의 관계가, 제아들이라는것만 알면 됐지,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우리만 확실히 알면됐지(디엔에이만 말하는것이 아니라 모든 관계성을 다 포함해서) 뭐 다른게 필요한가요. 객관성 보편성 과학성이라는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창조과학을 말씀하시는것 같기도 하고…

          후반부에서 지성과 영성에 대한 부분은 뭘 말씀하시는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 이야기는 개인의 지성과 영성의 연관성에 대한 제 개인적 생각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식으로 생각해도 상관없구요.

          선악과를 먹은건 죄악입니다. 선악과를 먹은것이 이성을 잉태시킨것이라면 그 이성은 죄의 부산물이 될 수도 있겠군요. 그런데 참 성경엔 역설적인게 많습니다. 예수님의 출생만해도 그렇습니다. 조상을 한번 보면, 기생도 있고…참…뭐 이런 가계도 다 있나 하고 생각되기도 하고. 죄지은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혀주는것도 좀 그렇고. 그런데 또 이성을 써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나라를 이루는데 쓰여지면 그것도 축복이 될수도 있고…이성을 바벨탑쌓는데처럼 하나님대적하는데 쓰면 재앙을 부르는 저주가 될수도 있고…

      • ㅎㅎㅎ 66.***.107.140

        우주에 대해 참 많이 아시네…
        좀 있으면 자신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주장할 기세여….

        • 2345 99.***.95.128

          영적영역이 일단 “내” 영혼에 인정되면, 어떤 첨단과학의 논리로도 하나님을 부정할수 없게 됩니다. 물론 과학의 눈부신 발전(높이 올라가고 있는 바벨탑)을 인정하면서도요. 높이 올라간 바벨탑은 더멀리까지 볼수있는 깨끗한 시야를 제공하는것이 아니라 점점 더 캄캄한 구름속으로 들어갈 뿐입니다. 어떤 과학자가 무신론자다, 또는 어떤 과학자는 신을 믿는다 하는 논리로, 자신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근거로 이용하려는 견해는 쓸모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은 최첨단의 학문을 연구하면서도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것이 당연하게 여겨질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과학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는것을 당연히 여길수도 있고.

    • sd.seoul 66.***.109.149

      불확정원리와 /관찰/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말씀하고자 하시는 (제 생각에 아마도) 측정의 문제는 양자역학의 문제가 아닌
      일상생활에서의 문제입니다.
      주로 드는 예로 타이어의 압력을 재고자할 때 재고나면 더이상 그 압력이 아닌 것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객관적이지 않은 건 과학이 아닙니다.
      객관적이지 않은 것의 예로는 예술이 있지요.

      • ewrq 75.***.92.218

        타이어의 압력예 감사합니다. 소립자충돌을 통한 관찰에도 적용되겠지요.

        간단히는 “소립자의 위치와 속도는 동시에 확정되지 않는다”라고 표현하는군요. 아마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것이 관찰/측정이라 함이, 광자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광자(또는 관계된 소립자)와 측정기사이에 상호작용이 필요합니다. 눈으로 관찰함은 광자가 눈에 와서 부딪치는 상호작용이구요.

        근본적으로 관찰/관측/측정에 관한원리입니다:
        http://ko.wikipedia.org/wiki/%EB%B6%88%ED%99%95%EC%A0%95%EC%84%B1%EC%9B%90%EB%A6%AC

        “불확정성원리(不確定性原理, uncertainty principle)는 양자 역학에서 맞바꿈 관측량(commuting observables)이 아닌 두 개의 관측가능량(observable)을 동시에 측정할 때, 둘 사이의 정확도에는 물리적 한계가 있다는 원리다. 불확정성 원리는 양자역학에 대한 추가적인 가정이 아니고 양자역학의 통계적 해석으로부터 얻어진 근본적인 결과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는 위치-운동량에 대한 불확정성원리이며,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위치가 정확하게 측정될 수록 운동량의 퍼짐(또는 불확정도)은 커지게 되고 반대로 운동량이 정확하게 측정될 수록 위치의 불확정도는 커지게 된다.”

        제가 객관적이지 못하다고 표현한 부분은, 위치를 측정할지, 운동량을 측정할지는 관측자가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 관측자의 결정에 따라서 위치든 운동량이 측정량이 바뀌게 되니 이런 측정결과에마저도 관측자의 주관이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 tracer 198.***.38.59

      양자역학의 난해함과 그 잘못된 이해가 요즘 많은 뉴에이지 철학(?)들의 양분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디팍 쵸프라니 시크릿이니 하는 것들, 나의 의지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우주는 나와 일체이다..등등의)

      • ewrq 75.***.92.218

        사실 제 불확정성원리에 대한 위의 예는 제가 대학교때 수업을 들으면서 생각한것입니다. 제 기억에 불확정성원리는 양자역학의 기본적인 슈뢰딩거 확률방정식을 만들어내는 아주 근본적인 원리입니다. 슈뢰딩거방정식없는 양자영학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뉴에이지와의 연관성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현학적인 물리학자들이 일반대중을 상대하는 책을 출판할때 주로 써먹는 분야중하나가 양자역학쪽인것 같습니다. 천재들이라서 그런지 기인들이라서 그런지 종교들을 그런 학문으로 이해하는 접근들을 하는걸 봅니다. 내게는 뜬구름 잡는것 같기도 한데…초심자들에겐 뭔가있고 참 멋있어 보이죠.

    • zzz 128.***.54.121

      재밌는 토론을 보면서 제 생각을 잠깐 보탭니다. 두측이 토론을 하고 있는데, 아마 끝나지 않는 영원한 토론이 될 공산이 상당히 있어 보이네요.

      주관적, 감정적, 또는 관념적인 진리가 핵심인 그룹에게 끊임없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증거를 대라는 질문을 하는 과학적인 그룹. 역으로 과학적인 그룹에게는 좀 주관적, 감정적, 관념적인 진리를 이해하라고 답하면서 그런 질문을 하는 호기심 가득한 그룹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인듯합니다.

      한국교회에 다녔던 저로서도 많은 의문과 진실을 때로는 왜곡되게 배워왔던지라, 지금은 혼자서 신앙의 본질을 찾기위해서 혼자서 애쓰면서 공부하는 중입니다. 공부하면 할수록 많은 의문과 호기심이 생기는건 어쩔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대답을 잘 풀어나가기가 참으로 힘들기도 하구요. 아마 이세상에 그 진리의 대답을 일점일획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대답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상대방의 그룹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서로를 존중하면서, 진지하게 토론한다면 이 토론을 통해서 좀 더 생각하고 배울수 있는게 많을거라는 생각이듭니다.

    • 삼천포 198.***.210.230

      여기 접시에 사과가 두개 있습니다. (일단 제 생각에는 두개입니다)

      그리고 이걸 몇개냐 하고 다른이에게 물어봅니다. 만약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걸 자신있게 “두개”라고 말한다면, 일단 저도 그 중 한 사람인 것입니다. 만약 두개가 아니라고 다른 답을 말하면 이중 하나 일겁니다.

      1. 보편타당한 조건을 바꾼 상태 또는 지극히 주관적인 입장에서 답을 말하는 사람
      예) 수십개다, 왜냐 난 이 사과가 나중에 뿌릴 사과를 보고있다, 수십억개다, 왜냐 난 분자를 봤다, 세개다, 왜냐 난 zoro도 챙긴다. 등등…

      2. 숫자 개념이 없는 사람이나 똘아이
      예) 엄마 사과줘…, 내가 미친넘으로 보이니? 왜 물어봐?

      3. 답변자가 인간이 아닌 존재.
      예) 개미: 나한텐 보이지도 않아, 외계인: &x*%#, 신: 허허허…

      문제는 만약 대다수가 두개가 아니라고 한다면? 저는 1,2,3 중 하나에 속하겠지요. ^^

      • ㄷㅂㄱㅈ 76.***.117.152

        사과 두개:

        개미에게는 평생먹을 양식
        사자에게는 거들떠 볼것도 없는 과일
        부자 육식주의자에게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간식거리
        과일한번 목먹어본 아이에게는 평생 한번이라도 먹어보고 싶은 과일

        여전히 사과는 숫자로 두개인것도 진실이되, 너무나 다른 관점들이 제각각 다 진실성을 지닌다. 그러나 그 관점들은 그 개미나 사자나 가난한 아이입장이 되어 보지 않으면 절대로 그 속에 담긴 그 진실성을 깨달을수가 없다.

        예전에 김춘수씨의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하는 구절이 생각난다.

    • 궁금 24.***.209.194

      한 마을에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여인이 있습니다. 마을 남자 하나 둘씩 그녀를 겁탈하기 시작합니다. 어느덧 그녀를 겁탈하지 않은 사람은 ‘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선택의 순간이 있겠지요?

      ‘아냐 이건 옳지 않아. 그녀를 보호해 줘야 돼”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아 씨팔, 다들 하는데 나만 안했네. 안한다고 누가 칭찬해 줄것도 아닌데 나 혼자 병신되는 거 아냐?’ 이런 생각에 기울어서 그녀를 겁탈할 수도 있겠죠.

      이 경우 이건 ‘내’가 선택한 건가요? 아니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건가요?

      • Block 12.***.134.3

        비신앙자의 입장에서는 분명 본인의 선택이고 용서될수 없는 본인의 죄입니다.
        신앙자의 입장에서는 사탄의 유혹에 (어쩔수없이?) 넘어간것이고 하나님에게 회개만 하면 모든 죄가 용서됩니다. 정말 편한 시스템이죠.

        하나님을 안믿지만 바르게 일생을 산 사람과 인생이 온갖 죄악으로 점철돼 있음에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 하나님은 두사람중 누구를 귀히 여기실까요? 하나님의 선택의 논리는 일상 생활에서 아부에 능하고 줄타기 잘하는 이를 귀히여기는 논리와 유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 Block 12.***.134.3

      신앙을 떠나서 ‘나는 옳음이요 나와 반한건 틀리거나 악이라는 이분법적 생각을 지양해야 한다’는 논지는 아주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이런 일부 바른(?) 생각들이 많은 부정적 요소속에서도 그나마 교회를 유지시키는 긍정의 힘이 아닐까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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