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원 오사구단군의 동생 오사달이 몽고족의 뿌리 – 국학원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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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句麗의 일식관측지가 蒙古高原 以西 및 以東이고, 710 년에서 792 년 까지의 日本 역사책의 일식관측지가 蒙古高原 이북 이라는 것은 蒙古高原도 우리나라 땅이라는 의미다. 黑龍江 상류에는 수초를 찾아 떠도는 生女眞이 있었다. 蒙古高原 없이는 生女眞을 전력화하지 않고 방치 하고서 시베리아를 유지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중국은 蒙古高原에 원래부터 蒙古가 있다고 하면서, 13 세기에 들어 와서야 징기스칸이 蒙古高原을 통일했다고 했다. 蒙古高原이 아니라, 중앙 아시아에서 蒙古部族을 통일한 것이다.

    蒙古가 중국 대륙에 내내 있었다면, 이런 추측 기사는 절대 있을 수 없다. 4 世 檀君 오사구(烏斯丘) 때의 기록 “甲申 원년(B.C. 2137) 천황의 동생 오사달(烏斯達)을 몽고리한(蒙古里汗)으로 봉했다. 혹 말하기를 지금의 蒙古族이 바로 그의 후손 이라고 한다(甲申元年封皇弟烏斯達爲蒙古里汗或曰今蒙古族爲其後云 檀君世紀).” 檀君世紀 原本은 高麗 시대에 편찬했다. 그 당시 까지는 우리나라 역사책이 전부 존재했다. 우리나라는 우리나라 역사만 기록한 것이 아니고, 중국 대륙의 수많은 나라와 종족에 대해서도 역사기록 하기를 잊지 않았다. 蒙古가 중앙 아시아로 빠졌다가 다시 중국 대륙으로 진출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역사기록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하고, 한때 九韓(桓)의 일원 이었는지를 확신할 수 없었다.


    ▲ 동아시아 현대지도

    과거 러시아(Russia)에게는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이었고, 잉글랜드(England)에게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가는 지름길 이었던 캐시미르(Kashmir).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역사적 사실은 中土를 정복한 異民族도 Kashmir로 해서 침입했다는 사실이다. England만 中土로 침입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 아니다. 靺鞨, 거란(契丹), 蒙汗이 England에 앞서 Kashmir를 통해 中土로 침입했던 것이다.

    ◀ 채달목분지 : 한자로는 柴達木盆地라고 쓰는데 차이다무 분지(Tsaidam Basin)로 발음된다.

    匈奴와 蒙古 등은 朝鮮 개국 당시에도 우리나라 영토인 타림분지 일대에서 흩어져 살았다. 北匈奴가 중앙 아시아로 밀려난 것처럼, 蒙古도 중앙 아시아로 방출됐다. 蒙古가 蒙古高原에 처음부터 지금까지 있었다고 날조했기 때문에 중앙 아시아로 이주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蒙古는 예전에 살았던 타림분지를 채달목분지(柴達木盆地)와 같이 얻었다. 타림분지(塔里木盆地,Tarim Basin)의 가치에 눈을 뜬 高句麗가 匈奴 등을 정복한 후 우리나라는 그 땅을 통해 이민족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철저히 수비했기 때문에 이후에 진출한 이민족은 Kashmir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蒙古族은 1270 년 이전에는 蒙古高原에서 살지 않았다. 1356 년이 아니라, 1368 년에 雙城總管府가 격파되고 쫓겨난 蒙古族은 공민제(恭愍帝)의 허락 하에 蒙古高原에 눌러앉아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蒙古族은 蒙古草原과 카스피해(Caspian Sea) 사이에서 유목활동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카스피해와 타림분지 (중가리아盆地) 사이에 있었다.

    北아메리카 인디언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그들의 본래 고향이 시베리아 바이칼호 근처로 밝혀져, 인디언이 蒙古族의 한 분파라는 학설을 뒷받침한다? 蒙古族이 아니라, 우리민족이 바이칼호 일대에 살았다. 기원전 7197 년에 개천한 한국(桓國)의 영토였고, 8 세기에는 大震國의 천문관측지다.

    蒙古族이 蒙古高原을 차지한 1270 년 이후에도 그곳에 살던 우리민족은 계속 거주해왔다. 현재 蒙古高原에 사는 사람은 두 종족인 것이다. 우리민족은 여러 족속들로 구성되어 있으니까, 여러 종족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1270 년부터 蒙古高原에 살기 시작한 사람들은 원래 蒙古高原 以西에서 살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몽골문자는 없다. 蒙古가 사용하고 있는 문자는 蒙古가 만들지 않았다. 우리민족이 만들었다. 蒙古族의 머리에서는 오직 초절정의 난잡한 性文化만을 개발한 華夏와 마찬가지로 그 어떤 창작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몽골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뜻이라고? 몽골의 자유화 전까지 몽고(蒙古)라고 불렸던 것은 ‘中華’와 상충하는 것을 봉쇄하기 위해 비하해 사용한 이름 이라면, 우리나라가 東아시아를 지배한 高麗時代까지는 몽골이라 불렀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蒙古族이 檀君이 다스리는 64 族의 하나였던 朝鮮時代에도 蒙古라는 이름을 썼다. 高麗時代도 蒙古라고 불렀다. 머언 고을 이라는 의미를 갖는 말이다.

    23 世 檀君 아홀(阿忽)때의 기록을 보면 “乙酉 2 년(B.C.1236) 남국(藍國)의 임금 금달(今達)이 청구(靑邱)의 임금, 구려(句麗)의 임금과 주개(周愷)에서 회합하고 몽고리(‘蒙古’里)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은(殷)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했다(乙酉二年藍國君今達與靑邱君句麗軍會于周愷合蒙古里之兵所到破殷城柵深入奧地定淮岱之地 檀君世紀).” “甲申 원년(B.C .2137) 천황의 동생 오사달(烏斯達)을 몽고리한(‘蒙古’里汗)으로 봉하였다(甲申元年封皇弟烏斯達爲蒙古里汗 檀君世紀).” 이 뒤에 따라오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혹은 지금의 ‘蒙古’족이 바로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或曰今蒙古族爲其後云 檀君世紀).”

    蒙古族은 烏斯達이 지배하던 蒙古里의 후손이라는 뜻이다. 檀君世紀는 高麗 末에 썼다. 高麗가 몽골이라고 불렀다면, “어떤 사람(或者)은 지금의 ‘몽골’족이 바로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라고 썼을 것이다. 몽골은 蒙古의 자유화전 이후에 생긴 이름인 것이다. 蒙古가 세계의 중심과 하등 관련이 없음은 蒙古의 옛 이름 몽고‘리’(蒙古‘里’)에서도 알 수 있다. 里는 ‘마을, 거리단위, 헤아리다, 근심하다, 거하다, 이미, 벌써’라는 별 시덥잖은 뜻만 있다. 蒙古 역시 별 볼 일 없는 뜻밖에 없다.

    蒙古는 그저 그런 우리나라 피지배종족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북방계 아시아인을 총칭하여 蒙古族이라 부르는 것조차 부적절하기 그지없는 말이다. 蒙古는 북방계 아시아인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몽고반점(蒙古斑點)은 ‘蒙古’斑點이 아니다. 北方系 아시아인 전부에게 나타나는 것이니까. 蒙古 여자가 高麗 皇帝에게 시집왔을 때조차도 蒙古가 아니라 高麗가 세계의 중심이었다.

    어째서 티벳은 원래부터 티벳고원에 있었다고 하고, 蒙古는 蒙古高原에 있었다고 하는가. 中國과 역사날조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합의한 이유는? 이미 중앙 아시아의 거주지도 상실 했는데, 날조사에 따르면, 티벳고원과 蒙古高原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강역(疆域)은 시베리아를 포함한 東아시아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를 베낀 中奴는 어째서 中土를 중국 대륙과 동북아로 한정 했을까. 李成桂가 朱元璋 등과 우리나라를 나눠가질 그 당시에는 시베리아가 우리나라 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베리아까지 다 中土라고 우긴다면, 大帝國의 허상이 깨진 러시아가 中華思想의 허구성을 반박했을 것이다.

    티벳, 蒙古, 러시아, 동남아, 중앙아시아(티벳이 티벳고원으로 이주하고, 蒙古가 중앙아시아에서 蒙古高原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이들 나라가 있던 지역을 중앙아시아의 소국들이 나눠가졌다)가 中奴의 중국 대륙 지배라는 날조사에 동조하는 것은 자국에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티벳’고원과 ‘蒙古’高原을 만들어내고 지명을 밀어내 역사를 날조하자, 中國이 옛날부터 중국 대륙 전체를 차지해 왔다고 받아 들여진 것이다. 三國의 일식기록과 桓檀古記가 없었다면, 완벽한 역사날조가 될 뻔했다. 티벳은 明이 揚子江 이남을 차지한 다음 티벳고원으로 들어오고, 蒙古는 1270 년이 되어서야 蒙古高原을 차지했을 뿐이다.

    티벳이 20 세기 까지 현대문명이 전혀 들어오지 못한 척박한 나라라고? 옛날에는 문명이 있었던 줄 아는가. 지금도 그 땅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목생활을 하고 있다. 이런 곳에 무슨 文明이 있었겠는가. 隋, 唐과 宋이 있던 그 시절 이라고 달랐을 것인가. 우리나라가 遣韓使(遣漢使)를 받아주고, 저 오지의 땅 中土로 가서 우리나라 文化를 전수해 주었건만, 中奴는 宋나라 때 까지도 “신자(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고 있었다(作衣如單被穿其中央貫頭衣之 三國志).” 그러니 揚子江 이남을 차지한 明 때 中奴의 서민 생활이 향상될 수 밖에.

    아무도 그 땅에 文明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처음부터 그 땅은 제쳐두고 中國의 영토를 논하는 것이다. 이는 中國史가 우리나라 역사를 베낀 날조요, 미개사라는 것을 말해준다. 中國이 인심 써서 종이 위에서나마 그 땅을 전부 티벳에게 준 까닭도 극한의 미개 땅이기 때문이다. 中國이 티벳고원 북부를 차지 하고는 중국 대륙을 지배한 文明國이라고 우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高仙芝가 정복한 중앙 아시아에 72 개국이나 있었던 것으로 보아, 티벳은 티벳고원만한 땅조차 차지하지 못했다. 티벳(西土)은 中奴가 揚子江 이남으로 나오기 전까지 그들의 삶의 공간 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