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뛰어넘는 리더십 갈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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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AA 66.***.2.220 3317

    한국 현대사에 결정적인 획을 그은 5·16이 어제로 50년을 맞았다. 반세기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났지만 평가는 간단치 않다. 훼예포폄(毁譽褒貶)의 다양한 평가는 여전하고 앞으로도 쉽게 결론이 날 것으론 보지 않는다. 누구든 알고 있지만 결국은 군사쿠데타로서의 본질적 속성과 그 후 일구어낸 경제적 성장, 그 두 가지 중 어느 쪽에 더 큰 비중을 두어 생각하느냐 하는 문제다. 그건 또다시 거의 제3 공화국과 같이한 내 개인적 성장기의 정체성과 관계된 문제일 수도 있겠다.

     역사의 평가는 지금 누구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영역의 문제가 아니다. 또한 후세의 평가가 다수결로 내려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박정희를 정부 수립 후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꼽은 수다한 여론조사나 그 핏줄을 가장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 꼽는 현 상황이 여전히 현재와 이어지고 있는 머지않은 과거에 대한 현 세대의 반응일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거사의 방식이 군사 쿠데타였다는 문제, 잠깐 꽃 핀 민주화의 후퇴란 그로 인한 심각한 폐해를 부정할 수는 없다. 30년이 넘는 세월이었다. 많은 사람이 불법체포와 구금·고문, 극형의 정신적·육체적 공포를 떠올릴 수밖에 없던 시대였다. 이제와 희미해져 그렇지 군사적 방식의 정변에 대해 두려움을 떨쳐버린 건 전두환·노태우 정권을 지나 김영삼 문민정부의 ‘하나회’ 해체란 극적인 고비를 넘고, 얼마 안 돼 벌어진 ‘알자회’ 해체로 일종의 군부 정치세력 소탕이 이뤄진 이후가 아니었나 싶다. 이젠 30대의 장성한 세대도 알지 못하는 일이겠지만, 그 잠재적 위협은 1990년대 초·중반까지도 결코 간단한 게 아니었음을 나를 포함한 50대 이상은 경험으로 안다.

     그런 간과할 수 없는 부(負)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두 가지 평가 잣대 중 흔히 산업화와 개발연대란 말로 표현되는 박정희 시대의 유산이 이후의 한국에 얼마나 큰 정(正)의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상대적 판단의 결과다. 부정적 평가를 내리는 이들도 먹는 문제가 국가적 차원에서 해결되기 시작한 게 박정희 시대였다는 것, 이를 바탕으로 한국의 경제적 위상이 현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만큼은 부인하지 않는다.
     이제 생각하면 별것 아닌 것 같다고, 독재라는 강압적 통치구조가 가능케 한 결과라고 할 수도 있다. 다소의 빠르고 늦음은 있을지언정 어차피 이루어졌을 역사적 순리(順理)였다고 논박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별것 아니라 볼 수 있을지 모른다 했지만, 먹는 문제 하나만 해도 북한이 정권 수립 60년이 넘도록 이루지 못하고 있는 꿈이다. 이를 현실로 만들어내고, 그 기반을 불과 20년 안쪽에 충실히 쌓아 지속 가능케 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국가적 차원의 빈곤 탈피를 이뤘다 했지만, 당시 방책으로 채택한 정부의 직·간접 자원 분배를 통한 수출주도형 공업화 전략이 결국 지금의 대기업 위주 경제구조와 양극화 상황을 초래했다는 비판이 있다. 연원을 따지자면 일정 부분 원인(遠因)이랄 수는 있겠지만 그걸 지금까지 원인(原因)으로 비판하는 건 온당치 않다. 외려 원조물자에 연연하던 내수의 한계를 벗어나 수출 공업화에서 활로를 찾으려 한 건 놀라운 안목이었다. 에너지의 절대량을 ‘신탄(薪炭)’으로 부르던 땔감에서 찾고, 텅스텐 같은 알량한 지하자원이 최대 수출품목으로 꼽히던 시절, 수출입국을 꿈꾸던 혜안을 지금의 눈으로 볼 수는 없다.

     중요한 건 수십 년 전 남겨준 유산 때문에 부작용이 생겼더라 하는 답답한 얘기가 아니라, 왜 그 후론 그런 ‘패러다임 전환’이라 할 만한 혜안을 갖지 못했느냐는 것이다. 거의 내 기자생활과 궤를 같이하는 박정희 사후, 여러 정권이 들어섰고 각각 나름의 역사적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미진한 느낌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들 정치적 구호를 내걸었지만, 한 걸음 앞서 시대를 통찰하는 비전과 실행력이란 제대로 된 작품을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다. 한 치 앞 정략이 아니라 통일 대비와 복지 시스템 강화, 성장잠재력 확충이라는 복잡한 시대적 과제를 풀어나가야 할 미래 리더십에 대한 갈증이 더해가는 요즈음이다.

    박태욱 대기자

    • ㄴ히;ㄴㄹ이ㅏ 72.***.204.9

      원칙을 무시하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자들이 승승장구하여 먹을것을 해결하였다면, 그 다음단계는 먹는문제보다 분명히 한 차원 높은 문제들이겠지요.

      먹는문제는 동물들의 문제이기도 한 저급한차원 문제 (생존에 직결될만큼 중요한것이도 하지요)이라서, 인간의 탈을 쓴 짐승같은 인간들이 앞서서 해결해 나갈수 있겠지만, 그 먹는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는 짐승들 수준의 사람들로서는 더이상 해결될 수가 없지요.

      일본제국 장교출신이 독립군 장교를 암살하고, 권력을 잡고 먹는 문제를 해결하였고, 그 따님도 현재 대권을 거의 확실할 만큼 내다보는 나라에서, 과연 먹는문제 이후의 복잡한 시대적 과제를 풀어 낼 수 있을까요? 더구나, 인간이 동물과 다름을 가르는 가장 큰 기준들인, 수치심이나 정의감, 도덕 윤리같은 것을 아예 생각지도 않은 패거리들이 일제시대 이후로 이제껏 한국 상류층을 형성해왔는데,

      먹는문제 말고, 그들이 더이상 무엇을 해결 할 수 있을까요? 먹는문제는 동물들에게도 중요한 문제이기에, 인간격을 갖추지 못한 그들에게도 중요한 문제였겠지요.

      저는 박태욱 기자같은 배운자들이, 위의 원글처럼, 근본적인 문제를 짧은 세치혀로 똥칠하려들면서도, 뻔뻔스럽게 기자연 할 수 있는 사회에서는, 박기자가 언급한 “복지 시스템 강화, 성장잠재력 확충이라는 복잡한 시대적 과제”들 같은게 과연 논의 될 수 있는것인지 웃음만 나옵니다.

      배불러져 키득데고만 있는 멍키들 데리고, 무슨넘의 복지니 복잡한 문제니 떠들고 있는지…

      ㅋㅋㅋㅋ

    • citizen 67.***.159.14

      독도문제 빌미된 ‘친일 군인’ 박정희의 ‘독도밀약’

      16일은 육군소장 박정희가 김종필 등 일단의 청년장교를 이끌고 쿠데타를 감행한 지 50년이 되는 날이다.
       쿠데타 성공 반세기, 사망 32년의 지난 지금도 박정희의 인기가 높은 편이다. 더 좋은 민주주의연구소(소장 백원우 민주당 의원)가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서치뷰’에 의뢰해 9~10일 이틀간 자동응답방식 여론조사를 통해 990명을 대상으로 전·현직 대통령이 재출마했을 경우 지지의향을 물을 결과(복수 응답) 57.5%의 지지율을 얻어 노무현(47.4%) 김대중(39.3%) 이명박(16.1%)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박정희는 재출마시 지지하지 않겠다는 의견에서도 가장 낮았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차기 대권주자 후보 지지도를 묻는 각종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아버지 박정희의 후광에 힘입은 바가 크다.

      다시 뽑고 싶은 대통령 1위, ‘박정희 신화’의 이면

       ‘조국근대화와 경제회생의 지도자’라는 박정희 이미지가 세월이 지나도 좀처럼 색바라지 않은채 어떤 면에서는 신화화하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이 1965년 6월22일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해 일본정부로부터 자금(3억 달러의 무상자금과 2억 달러의 장기저리 정부차관, 및 3억 달러 이상의 상업차관)을 조국근대화의 종잣돈을 마련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때부터 14년만에 타결된 한-일국교정상화 회담 타결은 일본쪽에 많은 것을 양보한 대가였다.

       16일 발간되는 책 은 박정희의 한일 회담을 둘러싼 저자세외교, 친일행적,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 빌미 제공 행위 등 박정희의 신화 이면에 숨은 또다른 실체를 낱낱이 폭로해 눈길을 끈다.

      일본통 정치경제학자가 쓴
      한일회담 둘러싼 박정희의 친일행적 폭로

       일본통 정치경제학자인 노 다니엘이 지은 이 책에 따르면 쿠데타에 성공한 지 5개월이 채지나지 않은 1961년 11월12일 박정희는 이케다 하야토 당시 총리와의 공식 회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혁명을 완수한 인간으로서 느끼는 것은 한-일 양국이 운명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우리 혁명정부는 이 기회를 잃지 않도록 한일 회담이 조기에 타결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일본의 한일문제에 대해 마음으로 성의를 보인다면 우리는(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처럼 많은 청구권 자금을 요구할 생각은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치적 배상 등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일본의 지원 자금을 필요로 했던 박정희는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보인 것이다. 노 다니엘은 “이같은 박정희의 말은 이케다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뉴스였음에 틀림없었다”면서 “이렇게 양국 정상의 회담은 간결했지만 이후 국교를 정상화하겠다는 약속의 기본정신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정상회담 뒤이어 일본 정계거물이 한자리에 모인 아카사카의 요정 ‘가와사키’ 오찬 회동에서 박정희는 자신의 마음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박정희 “잘 부탁드립니다” 예의바른 일본식 인사

      ≫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소위에 임관하기 직전인 1944년 6월 말, ‘견습 사관’으로 있을 때의 모습. 자료사진
      박정희는 다다미 위에 양손을 짚고 예의 바르게 일본식 인사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에게 젊다는 것 이외에 별다른 재산이 없습니다. 미숙한 소생을 잘 지도해주십시요.”

       지은이 노 다니엘은 “유창한 일본어 인사는 일국의 지도자가 아니라 후배의 그것이었다”고 지적했다.

       박정희는 정상회담에서 일본 지도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의 친일 경력을 동원하기까지 했다. 한국쪽은 정상회담 만찬 자리에 박정희의 만주신경군관학교 교장을 역임한 나구모 신이치로(1886~1963)이라는 예비역 중장을 참석시켜 은사와 자제의 아름다운 재회의 모습을 연출시켜 정해 약한 일본 정치가들의 가슴을 울려 경계심을 풀게 했다는 게 노 다니엘의 주장이다.

       나구모가 교장시절인 1944년 박정희는 3등의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하게 된다.

       나구모는 이렇게 인삿말을 했다고 한다. “제자 중에 일국의 최고 지도자가 나온 것에 대해 나는 눈물이 날 정도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박 장군을 잘 기억하지 못했지만 박 장군은 번번이 고려인삼을 보내주셔서 덕분에 이렇게 건강하게 지냅니다.”

        박정희에 친밀감을 느끼고 있던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아베 신조 전 총리의 외할아버지)는 박정희를 요정 가즈오로 초대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박정희가 했다는 말을 이렇게 적고 있다.

      “박정희, 군사혁명 때 메이지 유신의 지사들을 떠올려”

       “자기들 젊은 육군의 군인들이 군사혁명으로 일어난 것은 구국의 일념으로 타올랐기 때문이며, 일본 메이지유신의 지사들을 떠올렸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선배인 요시다 쇼인 선생과 다카스키 신사쿠, 그리고 구사키 겐즈이 등 처럼 했다고”

      지은이는 이에 대해 “박정희는 기시를 비롯해 일본 정치인들이 존경하는 바쿠후 말기 지사들의 정신을 배워 ‘그들처럼’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상응하는 ‘위로부터의 혁명’을 한국에서도 전개하고 싶다는 야망을 밝힌 것”이라고 평가했다.

       1948~1950, 1958~1963년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정무참사관으로 근무한 그레고리 헨더슨은 자신의 저서에서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혁명세력의 통치스타일에 대해서 옛 일본군의 쿠데타를 모방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상급장교들은 1930년 초반 일본 청년장교 집단이 일본의 문관정치에 대해 실력행사를 한 쿠테타를 머리 속에 담고 있었다.”

      한일회담 최대 걸림돌 독도문제…독도밀약은 어떻게 진행되었나

      ≫ 1964년 6월3일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해 한일회담 반대 시위대를 진압했다. 당시 시위에 앞장선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탄생한 ‘6·3세대’는 이후 유신독재 타도 투쟁의 전면에 서게 된다.
      박정희가 한일회담에 얼마나 서둘렀는지는 한일회담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이른바 독도문제에 대해 ‘미해결의 해결’을 시도한 일본정부와 독도밀약을 체결한 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박정희는 외무장관, 주일 한국대사 등 공식 협상창구를 배제한 채 김종필의 친형으로 일본통인 김종락을 동원해서 막후협상을 맡겨서 결국 “독도·다케시마 문제는,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써 해결한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조약에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밀약을 성사시켰다고 노 다니엘은 이 책에서 폭로했다.

       특히 독도밀약 1항은 “양국은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을 인정하며, 동시에 그것에 반론하는 것에 이론이 없다”고 허용함으로써 일본정부에 결국 독도밀약을 근거로 매년 영유권 주장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박정희는 1965년 2월17일 한일회담을 공식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한 시이나 에쓰사부로 외상의 환영 만찬 때 장군들을 응원단으로 동원하기 까지 했다.

       노 다니엘은 “5·16 주도세력과 12·12 주도세력의 또 다른 공통점은 둘다 ‘박정희 팬클럽’에 가까운 모임으로서 박정희의 가치관과 세계관, 특히 일본에 대한 관념을 공유했다”고 지적했다. 하나회 멤버들인 12·12주도 세력은 무엇보다 박정희가 보여준 일본식 군인정신에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본의 여류소설가 야마사키 도요코의 장편소설 를 애독하고, 그 주인공의 실제모델인 이토추 상사의 세지마 류조(2차세계대전 당시 작전 참모)를 존경했다.

      군인 친일주의자들의 독도밀약 정신은 노태우까지 이어져

       실제 세지마는 하나회 출신의 전두환, 노태우에게 자신이 영향을 끼쳤다고 회고록인 에서 술회했다.

       “쇼와 55년(1980년) 3월께 이병철 회장에게서 연락이 와 ‘한번 꼭 방한하셔서 군의 선배로서 전두환, 노태우 두 장군을 격려하시고 조언을 해주기 바란다. 경제관계의 문제도 있으니 도큐 그룹회장 고토 노보루씨도 동행하셨으면 좋겠다’라고 요청해왔다. 고토씨도 이 요청을 받아들여 그해 6월 둘리서 방한했다. 우리의 안내역은 권익현(당시 삼성물산 상무, 육사 11기로 나중에 민주정의당 대표)씨로 그의 안내로 전 장군, 노 장군을 만났다”

       노 다니엘은 ‘군인 친일주의’는 본능에 가까운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정희 정권에 이어 전두환 노태의 두 군사정권이 존속한 1993년까지 소위 군인 친일주의는 지속됐다. 그 자신을 포함해 한국의 직업군인들은 기본적으로 친일주의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예전에 만주군관학교나 일제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선배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들에게 일본과 사이좋게 지낸다는 것은 본능에 가까운 관념이었다”

       독도밀약의 정신이 박정희 시대를 넘어서 전두환과 노태우까지 이어졌던 것도 이런 배경이 있다고 노 다니엘은 강조했다.

      • ???? 72.***.246.34

        그건 노다니엘씨 생각이고..

        노다니엘씨에대한 내 생각은 사이비 약장수 같은데..

    • ???? 72.***.246.34

      후대에 남이 한말이나 행적을 짜깁기해서 영웅 만들거나, 역적 만드는건 아주 쉽죠.

      거기 홀딱 넘어가서 정말 그런가부다하는건 바보들이나 하는거죠..

      아니면 외부와의 정보가 단절된 북한 주민들이거나..

      자서전들 나와있는거 보면 모두 자기 자신에대한 미화뿐..

      그러한 자서전들보다 더 문제가 이렇게 누군가를 의도적으로 깍아내리기 위해서 쓴 글입니다.

    • ???? 72.***.246.34

      전직 대통령들에대한 터무니없는 미화도 좋지않지만, 의도적으로 깍아내리기 위한 글은 더욱 좋지않죠..

    • hhh 205.***.100.200

      이 양반좀 닮아 인기몰이하려고 선그라스끼고 병신짓한 사람도 있는데 그 사람이 일국의 대통령이됐다고 하네요…그 나라엔 인물이 씨가 말라버린듯..나는 여기서 오늘하루도 열심히 버티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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