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Talk Free Talk 박정희의 독립군 때려잡기 This topic has [16] replies, 1 voice, and was last updated 10 years ago by 사일구. Now Editing “박정희의 독립군 때려잡기” Name * Password * Email Topic Title (Maximum Length 80) 저 밑에 '선조의 지혜' posting에 "박정희가 만주국 장교로 독립군 때려잡은 일이 없는데 독립군 학살하고 다녔다고 우기는것도 모자란 소리고 일제패망후 입국할땐 독립군 자격으로 들어온거 모르나"라고 어느 일베버러지 똘마니새끼가 있릴래(50.***.157.167 너말이야 이 똥대가리야... 잘 새겨들어) 이 글을 쓴다.. 우선 맛베기로 보도자료 하나부터 보고 들어가자. [‘박정희, 독립군 토벌’ 주장글 게재 기자 무죄 확정] <a h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8101633291&code=940301" title="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8101633291&code=940301">http://www.pressbyple.com/news/articleView.html?idxno=9459</a> 아래의 글은 50.***.157.167를 비롯해 아직도 친일앞잡이가 뭔지 분간도 못하는 어린 애송이 일베버러지 24.***.96.11도 함께 보고 공부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또한 아래의 글은 다음을 참조했음을 밝힌다. 1. 朝鮮總督府及所屬官署職員錄 2. (滿洲國)政府公報 1940.1.6 3. 滿洲新聞 1939.3.31 4. 滿鮮日報 1942.3.24 5. 滿洲日日新聞 1942.3.24 6. 每日新報 1944.4.22 7. 滿洲國軍誌(1987) 8. 실록 군인 박정희(2004) 박정희는 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선산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고령이다. 1926년 4월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32년 3월 졸업했다. 1932년 4월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하여 1937년 3월 심상과(尋常科)를 제4기생으로 졸업했다. 1937년 4월 경상북도 문경면의 문경공립보통학교(1938년 문경서부심상소학교로 개칭) 훈도로 부임해1940년 2월까지 근무했다. 훈도로 재직 중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관으로지원하였으나 일차 탈락하고 재차 응모하였는데, 당시의 정황이 만주지역에서 발행되던 일본어신문인 만주신문(滿洲新聞) 1939년 3월 31일자에 「혈서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로부터」라는 제목으로 상세히 보도되었다. 기사 전문에는 “29일 치안부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공립소학교 훈도 박정희 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고 피로 쓴 반지(半紙)를 봉입(封入)한 등기로 송부되어 관계자(係員)를 깊이 감격시켰다. 동봉된 편지에는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두렵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아무쪼록 국군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중략)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후략)’ 라고 펜으로 쓴 달필로 보이는 동군(同君)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이지만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자격 연령 16세 이상 19세이기 때문에 23세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에게는 안타까운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라고 하여 군관학교 지원의 동기와 좌절된 사연을 미담으로 소개했다. 기혼자인 데다가 연령 초과로 입학 자격이 문제되었으나 다시 도전하여 결국 1939년 10월 만주 무단장시(牡丹江市)에 소재한 제6군관구 사령부에서 4년제 만주국초급장교 양성기관인 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 제2기생 선발 입학시험을 치르고 1940년 1월에 15등으로합격했다. 만계(滿系 : 日系 외 통합분류) 합격자 240명중 조선인은 11명이었다. 자격 제한의 벽을 넘어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사자의 강고한 지원 의지와 함께 대구사범학교 재학 시 교련배속장교로 있다가 전임하여 신징(新京) 교외 제3독립수비대 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관동군 대좌 아리카와 게이이치(有川圭一 : 1945년 6월 오키나와에서 전사)의추천, 그리고 대구 출신으로 신경군관학교 교관부에 일시 근무하고 있던 간도특설대 창설요원인 강재호소위(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 세칭 봉천군관학교 4기)의 도움이 있었다. 1940년 4월 신경군관학교 예과과정에 입교해 제3련(連) 제3구대(區隊)에 소속되어 군사교육을 받고 1942년 3월 졸업했다. 졸업식에서 일계 2명, 만계 2명과 함께 우등생으로 선정되어 만주국 황제 푸이(溥儀)가 하사하는금장 시계를 은사상(恩賜賞)으로 받았다. 예과 졸업 후 타호산(打虎山)에 있는 제6군관구 예하 제5단(第五團) 제3영(營) 제8련(連)에 파견되어 2개월간 조장(組長)으로 부대실습을 한 후 다시 관동군 보병 제30연대 일명 다카다(高田)부대에 파견되어 3개월간 실습을 마쳤다. 1942년 10월 성적 우수자로서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했다. 1944년 4월 일본육사 제57기와 함께 졸업한 뒤 견습사관으로서 소만(蘇滿)국경 지대의 관동군 23사단 72연대[치치하얼(齊齊哈爾)에 주둔한 관동군 635부대라고도 한다]에 배속돼 2개월여 근무한 후 같은 해 7월 만주국군 제6군관구 소속 보병 제8단으로 옮겨 배장(排長 :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같은 해 7월 하순경부터 8월 초순까지 제8단의 2개대대가 일본군과 합동으로 팔로군을 공격할 때 소대장으로 작전에 참가했다. 1944년 12월 23일 일본군 소위로 예비역으로 편입됨과 동시에 만주국군 보병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보병 8단으로 부임해 단장의 작전참모 역할을 하는 을종(乙種) 부관 겸 부대의 단기(團旗)를 책임지는 기수로 근무했다. 옌지(延吉)에서 조직된 8단은 간도지구경비사령부 히노 다케오(日野武雄) 소장이 편성한 히노지대(日野支隊)를 기반으로 출발하였으며, 처음에는 주로 동북항일연군과 소련에 대한 작전을 수행했다. 1938년 7월 말부터 두만강 유역 하산호(湖) 일대에서 벌어진 국경분쟁에서 일본군이 소련군에 패퇴하는 장고봉(張鼓峰)사건이 발생한 이후, 만주국 국경경비대를 해산하고 국경경찰대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만주국군 잔류를 원하는 군인들을 기간으로 히노지대를 신설했다. 히노지대는 장비와 전투력이 우수하고 대원들의 일제에 대한 충성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아 8단의 주력으로 재편되었다. 1943년 8단은 중국 관내의 팔로군을 공격하기 위해 러허성(熱河省) 칭룽현(靑龍縣)과 싱룽현(興隆縣) 일대로 이동해 쭌화(遵化) 인근의 팔로군 11·12단(團)에 대한 작전을 전개하는 한편 집단부락정책을 실시했다. 1944년 4, 5월경부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8단은 칭룽현 서남부의 반벽산(半璧山)을 중심으로 남북 지역에 산재한 팔로군과 교전했으며, 이때 을종 부관으로 8단 예하 각 부대에 작전 지침과 명령을 하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8단에 근무하던 조선인 출신 장교로는 배장 방원철(신경군관학교 2기)과 제1영 본부의 이주일(신경군관학교 1기, 일본육사 56기 해당)이 있었으며, 뒤이어 신현준(봉천군관학교 5기)도 간도특설대에서 8단 연장(連長 : 중대장)으로 전입해 왔다. <img src="http://i2.media.daumcdn.net/photo-media/201208/30/sportsseoul/20120830165718953.jpg" alt="." /> (일본군 중위 다카키마사오(한국명 박정희)가 독립군토벌대 만주군 군관지원하면서 쓴 충성맹세 혈서가 일본국회도서관에서 발견됨 - 滿洲新聞 1939.3.31자 7면) 1) 혈서의 내용 -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 2) 혈서에 동봉된 편지 내용 -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I agree to the terms of service Update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