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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단군조선 붕괴이후 해모수 고구려+고두막 부여+고추모 고구려(900년) – 국학원 발췌[삼국사기]고구려본기 보장왕 27년조에 의하면 당나라의 시어사 가언충은 [환단고기]기록내용과 정확히 맞게 B.C 232년에 고구려가 건국되었다고 보았다. 가언충의 이러한 계산은 해모수계 고구려, 동명계 부여, 고주몽계 고구려를 모두 같은 나라로 보았기 때문이다.국학원 발췌 당나라까지 고구려 연대를 900년으로 명확히 보고 있는데 고구려의 후손된 우리가 고대사를 인지하지 못하여 해모수를 고추모의 아버지로 만들어 버리는 불충을 범한다면 이 얼마나 주변국가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인가! – 국학원 발췌 그래서 고대사를 정확히 사실적으로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환단고기]를 위서취급하는 자들을 식민사관.동북공정 노예의식에 사로 잡힌 자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 국학원 발췌단군나라 국호변경 : 한국(초대 단군임금)=>조선(22색 색불루 단군임금)=>대부여(44대 구물 단군임금)/해모수 고구려=>고두막 부여=>고추모 고구려
– 국학원 발췌
사람들은 해모수를 고추모 아버지로 만들어 버리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그게 강단사학의 문제라는 겁니다. mbc주몽이 그래서 역사날조를 한 거지요. – 국학원 발췌해모수는 기원전 200년대 사람이고 고추모는 기원전 79년생으로 해모수는 고추모의 아버지가 될 수 없고 고추모의 고조 할아버지가 되지요. 고추모 아버지는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면서 고추모의 증조 할아버지가 되는 고진(고리군장)의 손자였던 고모수(불리지)라는 사람으로 부여의 제후(옥저왕)가 됩니다. – 국학원 발췌
고조선은 망한 게 아니라, 47대 고열가 단군임금이 더 이상 어명이 먹혀들지 않자, 나라문을 닫고 산 속으로 들어가 버리면서 연방체제가 붕괴되고 5가 공화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 국학원 발췌
이 때 고열가 임금의 친척인 해모수가 웅심산에서 군대를 일으켜 5가 공화정을 접수하고 ‘고구려’를 열게 됩니다. 해모수 선조나라는 ‘고리’인데, 해모수의 성씨가 고씨이기 때문에 ‘고구려’라 정한 것이고 고추모가 소서노 아버지 고무서 단군의 유언에 따라 부여 단군에 올랐다가 부여인들이 반대하자, 환인지역으로 이주하여 나라를 세우면서 해모수가 정한 고구려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한 거지요 . 그래서 고구려는 해모수나라와 동명왕 고두막의 부여를 계승했다면서 백제와 정통성 싸움을 하게 되는 것이죠. – 국학원 발췌
고구려에서 나온 온조가 시조로 삼았던 동명왕(고두막)의 부여라는 국호는 소서노의 할아버지 고두막(동명왕)이 해모수 왕조를 접수하고 정한 국호이기 때문이죠. 사실 ‘부여’는 44대 구물 단군임금이 바꾼 국호 대부여에서 나오는 거지요. 따라서 고두막이라는 사람은 44대 구물 단군임금과 관련된 혈통이라 할 수 있죠. – 국학원 발췌
은나라에서 망명한 기자후손 중에 번조선 단군이 된 기비라는 사람이 있는데, 해모수가 단군이 되는데 도움을 준 사람이죠. 그러던 중 기자조선(번조선)이 기준시대에서 망명한 위만세력에게 속아서 권력을 상실해 버리면서 요서.산동지역을 위만에게 상실하게 되고, 이 때 번조선(기자조선) 유민들이 대거 만주와 한반도로 이주하게 되는 겁니다. – 국학원 발췌
옥저.대방.예맥.낙랑 등 한반도 북부지역에 세워진 조선유민 국가들이 그런 나라들입니다. 그러니까 옥저.대방.예맥 등은 요서.요동지역에 존재한 기자조선의 제후국들이였던 거지요. 기자조선을 차지한 위만은 자꾸 해모수 지역인 요하 동쪽인 만주지역을 침략하게 되고, 이 때고추모 아버지 불리지도 위만세력을 격퇴한 공로로 옥저왕이 되는 것이지요. – 국학원 발췌
진조선지역이였던 만주지역은 해모수 부여가 존재하게 되고 마조선지역인 한반도지역은 조선유민들의 나라들로 분할됩니다. 그래서 47대 고열가 단군이후 고조선의 연방체제가 붕괴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 국학원 발췌
부여에서 나온 고구려와 백제가 고토를 회복하겠다는 다물(담로)정신으로 기자조선지역이였던 요서.산동.절강지역을 차지하고 치열하게 정통성 싸움을 벌이게 되는 거지요. 근초고대왕과 광개토태왕의 고토회복의지는 이러한 단군조선연방의 붕괴에서 나온 것임을 이해해야 하는 겁니다. – 국학원 발췌
[환단고기]는 시대별로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 국학원 발췌[환단고기-북부여기]
1세 해모수 단군
해모수 재위 8년(B.C.232년) 단제께서는 무리를 이끌고 가서 옛 도읍의 5가들을 회유하시니 마침내 공화의 정치를 철폐하게 되었다. 이에 만백성들이 추대하여 단군이 되었다. 겨울 10월 공양태모(公養胎母: 현자를아끼고, 태교를 생각하는법)의 법을 세워 사람을 가르침에는 반드시 태교부터 실시하도록 하였다. – 국학원 발췌
경진 (해모수 재위)19년(B.C.221) 기비가 죽으니 아들 기준을 아비의 뒤를 이어 번조선의 왕으로 봉하였다. 관리를 보내 병사를 감독하고 연나라를 대비하는 일에 더욱 힘쓰도록 하였다. 연 나라는 장수 진개(秦開:제나라의 장군으로 동호 즉 조선에 인질로 잡혀 있다가 나중에 돌아가 조선을 침범하여 조선이 양평에 성을 쌓아 국경으로 삼았다.)를 파견하여 우리의 서쪽 변두리 땅을 침략하더니 만번한(滿番汗:최근 연구로 난하 북경 북쪽의 창평임이 밝혀짐)에 이르러 국경으로 삼게 되었다. – 국학원 발췌
기해 (해모수 재위) 38년(B.C.202), 연나라의 노관이 다시금 요동의 옛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패수로써 경계를 삼으니 패수는 오늘날의 난하이다. 병오 45년(B.C.195), 연나라의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은 우리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나 이를 거부했다. 후에 번조선의 왕 기준이 크게 실수하여 위만을 박사로 모시고 상하운장을 떼어 위만에게 봉해 주었다. 이해 겨울 단제께서는 붕어하시고 태자 모리수가 즉위 하였다. – 국학원 발췌
4세 단군 고우루 재위 34년신유 원년(B.C.120), 장수를 보내 (위만조선)우거를 토벌하였으나 이로움은 없었다. (해모수 둘째 아들이자 고추모의 아버지되는 불리지의 할아버지)고진을 발탁하여 서압록(한반도의 압록이 아니라 내몽골지방)을 수비하도록 하니 병력을 늘리고 많은 성책을 설치하여 능히 우거를 대비하는데 공이 있었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후(해모수 선조나라가 되는 고리국왕을 삼았다는 의미다)로 삼았다. – 국학원 발췌계유 13년(B.C.108), 한의 유철(한무제)이 평나를 노략질하여 우거(위만의 손자)가 혼란스럽자 번조선인 최最가 우거를 살해하였다. 뒤에 성기가 반항을 하였으나, 그 또한 번조선인에 의해 살해되었다.이러하여 우거가 망하자 한이 4군을 두고자 병력을 치막시키니, 이에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의 군을 연파하였다. 이러자 그 지역의 백성들 모두가 군사를 도와서 크게 떨쳐 보답하였다. – 국학원 발췌
*각주:한4군 문제-한무제는 위만조선과의 1년간의 전쟁에서 처참하게 참패하자 전쟁에 참가했던 육군사령관 순체과 해군사령관 양복,무제의사신 위산과 공손수의 네사람을 모두 능지처참에 해당하는 기시라는 최악의 사형으로 발기 발기 찢어 죽였다고한다. 만약 전쟁에서 이겼더라면 개선장군일 이 사람들을 왜 죽였겠는가, 이것의 대답은 생각해보지 않아도 누구나 알수있는 사실이다. 한4군은 한무제 시기에 설치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즉,위만조선이 망한 건 기자조선세력과 위만조선세력간의 권력투쟁으로 붕괴된 것이고 승리한 기자조선세력이 한나라에 투항하여 제후가 됨으로써 훗날 한4군이 설치되었다고 할 수 있다. – 국학원 발췌갑오 34년 10월 동명왕 고두막한은 사람을 시켜서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하니, 왕은 이 땅에서 옮겨 가시오”라하니 단제는 매우 곤란해 졌다.마침내 단제께서는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동생인 해부루가 이에 즉위 하였는데 동명왕은 여전히 군대를 앞세워 이를 위협하기를 끊이지 않으매 군신이 매우 이를 어렵게 여겼다. 이때 국상인 아란불이, “통하의 물가 가섭의 벌판에 땅이 있는데 기름지고 오곡이 썩 잘됩니다. 서울을 둘만한 곳입니다”라고 하며 왕에게 권하여 도성을 옮겼다. 이를 가섭원 부여라 하며 또 동부여라고도 한다. – 국학원 발췌5세 단군 고두막(혹은 두막루) 재위 22년, 제재위 27년계유 원년(B.C.108년), 이 해는 단군 고우루13년이다. 제(동명帝)는 사람됨이 호탕하고 용맹하여 군사를 잘 다루었다. 일찌기 북부여(해모수 고구려)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명히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졸본(卒本)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이라 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고열가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 국학원 발췌을해 3년(B.C.106) 제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었다. 열흘이 못되어 5,000명이 모여 한나라 도둑들과 싸울 때마다 먼 곳에서 그 모습만 보고도 흩어져 버리므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구려하를 건너 요동의 서안평(西安平:후에 요의 상경 임황부가 되었다)에 이르니 바로 옛 고리국(藁離國:바이칼호부근에서 내몽골까지)의 땅이었다. – 국학원 발췌* 각주:고리국은 위만조선과 한나라 침략이후 흑룡강지역으로 이주하였고, 동명왕 고두막이 바로 흑룡강지역 고리국왕의 아들이며, 흑룡강 상류지역인 오논강에서 출생한 징기즈칸이 바로 고리군장[몽골비사에 기록됨]이다. 해모수(해모수 고조 할아버지).고두막(소서노 할아버지).고추모.징기즈칸.박혁거세 모두 단군조선의 봉후국이였던 KOREA고리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 국학원 발췌
[환단고기] 고구려국 본기 – 국학원 발췌
고구려의 선조는 해모수로부터 나오나니 해모수의 고향은 고리국이다. <조대기>>에선 이렇게 말한다. [해모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웅심산에서 일찌기 살다가 부여의 옛 서울(길림)에서 군대를 일으키니 무리가 추대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니 이를 부여의 시조라고 한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관을 쓰고 용광의 검을 차고 오룡의 수레를 탔다. 따르는 시종이 오백여명이 있었는데 아침엔 정사를 듣고 저녁엔 하늘로 오르니 호령하지 않아도 절로 관경이 교화되었다. 산에는 도적이 없고 벼와 곡식이 들에 그득했다, 나라에 큰 일 없고 백성 또한 일 없었다. 단군 해모수가 처음 하늘에서 내려 오심은 임술(BC )4월 초 여드레로서 곧 진시황 정의 8년이다. ] – 국학원 발췌고리군의 왕 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며 옥저후 불리지는 고진의 손자이다. 모두 도적 위만을 토벌한 공을 세워 봉함을 받은 바라. 불리지는 일찌기 서쪽 압록강변을 지나다가 하백녀 유화를 만나 그녀를 맞아 들여 고주몽을 낳게 하였다. 때는 곧 임인(BC 79) 5월 5일이라. 곧 한나라왕 불능의 원봉2년이다. 불리지가 죽으니 유화는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돌아왔으니 지금의 서란이다. 주몽이 성장하여 사방을 주유하다가 가섭원을 택하여 거기서 살다가 관가에 뽑혀 말지기로 임명되었다. 얼마 안되어 관가의 미움을 사서 오이와 마리외 협보와 함께 도망하여 졸본으로 왔다. – 국학원 발췌때마침 부여왕은 후사가 없었다. 주몽이 마침내 사위가 되어서 대통을 이으니 이를 고구려의 시조라 한다. 32년 갑오(BC 27)10월 북옥저를 정벌하여 이를 멸망시켰다. 을미년에 졸본으로부터 서울을 눌현으로 옮겼다. 눌현은 지금의 상춘 주가 성자이다. 유리명제의 19년 또 눌현으로부터 국내성으로 옮겼으니 또한 황성이라고도 한다. 성안에 환도산이 있는데 산 위에 성을 쌓고 일이 있으면 여기에 머물렀다. 대무신열제의 20년, 제는 낙랑국을 습격하여 멸망시켰으니, 동압록 이남이 우리에 속했는데 애오라지 해성의 남쪽, 바다근처의 여러 성들만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다. 산상제의 원년 동생 계수를 파견하여 공손탁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현도와 낙랑을 정벌하여 이를 멸망시켰다. – 국학원 발췌
대변경에서 말한다. – 국학원 발췌‘고주몽성제는 조서를 내려 가로대,<천신께서 만인을 만드실 때에 하나의 상으로서 균등하게 삼진을 주시었으니 이에 사람은 저 하늘을 대신하여 능히 세상에 서게 되었다>라고 하셨다. 하물며 우리나라의 선조는 북부여에서 나와 천제의 아들이 되었다. 밝은 이의 마음이 비어 고요함은 계율에 뿌리를 두는 것이니 오래도록 사특한 기운을 눌러 그 마음이 안락하고 태평하다. 이에 뭇 사람과 함께 일하면 항상 잘되는 것이라. 병력을 쓰는 까닭은 침범을 느슨하게 하려함이요. 형을 행함은 죄악을 없앨 것을 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허가 지극하면 정이 생기며, 정이 지극하면 지혜가 가득하며, 지혜가 지극하면 덕이 융성하다. 때문에 마음을 비워 가르침을 듣고 고요한 가운데 헤아리며 지혜로써 사물을 이치대로 하고 덕으로써 사람을 다스린다. 이것이 곧 신시의 개물교화이다. 천신을 위해서는 성품을 열고 중생을 위해서는 법을 세우고, 선왕을 위해서는 공을 다하고, 천하만세를 위해서는 지와 생을 나란히 닦는 교화를 이룸이라.’ – 국학원 발췌
(비교자료:해모수 고구려=>고두막 부여=>고추모 고구려 )고구려는 고추모가 세운 것이 아니라, 해모수가 세운 것이고 후에 고추모가 나라를 세우면서 그대로 사용한 국호다.환단고기 북부여기에 의하면 高九黎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시기는 B.C 239년에 해모수가 나라를 세우고 구려 앞에 천제를 뜻하는 高를 붙여 高九黎라 불렀을 때이다. 고구려를 일명 북부여라고 불렀는데, 고구려를 북부여라고 부른 시기는 B.C 86년에 동명계 고구려 무리가 해모수계 고구려 무리를 동쪽 가섭원으로 밀어내고 수도에 입성하여 나라 이름을 북부여라 불렀을 때이다. 고기에는 해모수계 고구려 4대 역사가 북부여기 상권에, 동명계 고구려 2대 역사가 북부여기 하권에 각 적혀 있다.★ BC 239년에 해모수가 고구려(高九黎)=북부여 건국★ BC 86년에 동명계 고구려 무리가 해모수계를 동쪽 가섭원으로 밀어냄(동부여)지나 사서에는 고구려가 高句麗, 高句驪 또는 句麗, 句驪로 적혀 있다. 이는 중국의 사가들이 지나왕조의 황제 이외는 천제의 아들을 칭할 수 없다는 뜻으로 천제를 뜻하는 高를 빼고, 천하의 중심지는 지나왕조의 황제가 있는 곳뿐이라는 뜻으로 천하의 중심지를 뜻하는 九를 같은 발음의 다른 한자인 句로 바꾸고, 무리를 뜻하는 黎를 같은 발음의 다른 한자인 麗, 驪로 바꾸어 적은 것이다.후에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온 고추모 고구려는 지나식 표기대로 高句麗 또는 高麗로 적었다.환단고기 북부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B.C 239년에 해모수에 의하여 건국되었다.해모수는 임술년(B.C 239년)에 웅심산에서 일어나 난빈에 궁실을 쌓고 고구려를 건국하였고, 다음해 계해년(B.C 238년)에 단군조선의 수도 장당경을 고립시키기 위하여 기자조선왕 기비와 몰래 약속하고 해모수는 백악산아사달(장춘 방면)을 점령하여 단군조선의 수도 장당경을 북쪽에서 고립시켰고, 기자조선왕 기비는 요동반도 방면에서 단군조선의 수도 장당경을 남쪽에서 고립시켰다. 해모수와 기비가 단군조선의 수도를 고립시키자 단군조선의 47세 고열가 단군은 더 견딜 수 없어 5가에게 나라를 맡기고 산으로 들어감으로써 단군조선연방은 붕괴하였다.그후 5가가 함께 다스리기를 6년 동안이나 계속하였는데, 해모수는 기사년(B.C 232년)에 5가 회유에 성공하여 전에 단군3조선 중 진조선이 관할하던 지역을 모두 장악하고 나라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단군이 되었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 보장왕 27년조에 나오는 당나라 시어사 가언충의 답변에 의하면 가언충은 고구려가 건국된 해를 B.C 232년으로 보았다. 이 해는 해모수가 나라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단군이 된 해이다.그 후 B.C 108년에 한나라가 내부분열로 붕괴된 위만조선을 접수하고 다음해 요하 동쪽 고구려 지역을 점령하여 한4군을 설치하자 동명(고두막)이 일어나 한나라 군사와 싸우는 과정에서 세력을 얻어 B.C 86년에 해모수계 무리를 수도(장춘 방면) 동쪽에 있는 가섭원(연해주 지역)으로 밀어 내고 수도에 입성하여 이때부터 동명계가 2대 동안 골본부여(북부여)라 칭하며 통치하였다.그 후 B.C 58년에 골본부여 고무서 단군이 죽고 고추모가 유언에 따라 대통을 이었으나, 골본부여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여 부여인들이 죽이려 하므로 이를 피하여 무리를 이끌고 환인지역으로 이주하여 나라를 세우고 고구려라 칭하였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는 (고추모)고구려는 고구려로, 연해주지역의 가섭원부여는 동부여로, 길림방면의 골본부여는 부여로 각 적혀 있다. 동부여는 고구려 대무신왕 때 멸망당하여 고구려 제후국이 되었다가 광개토태왕 때 조공을 바치지 않고 반항하다 다시 정벌당하였으며, 골본부여는 읍루의 압박으로 고구려 문자명태왕 떄 왕족이 고구려에 투항함으로써 멸망하였다.고주몽 고구려● 정리[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는 고추모가 세운 나라의 명칭이 고구려로 적혀 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고추모가 세운 고구려만 고구려로 알고 있다.[환단고기]북부여기에 의하면 고구려라는 명칭은 B.C 239년에 해모수가 (高九黎(일명 북부여)를 세웠을 때부터 사용되었다.그 후 동명왕 고두막이 한나라를 크게 물리치고 민심을 얻어 해모수 고구려왕조를 접수하고 골본부여라 정하게 되었고, 고무서 단군이 죽을 때 동부여에서 망명해 온 고추모가 사위 자격으로 골본부여의 대통을 이었으나, 부여인들이 죽이려 하므로 무리를 이끌고 환인지역으로 이주하여 졸본천(일명 비류수:혼하) 상류에 나라를 세우고 다물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면서 나라 이름을 전처럼 고구려라 불렀다. 그것은 선조의 나라(고리)를 기억하고 선조의 땅(서안평=서요하 지역)뿐만 아니라, 단군조선의 고토을 되찾겠다는 다물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즉 (고주몽)고구려는 B.C 58년에 高九黎(북부여)가 분열되었을 때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온 1무리이다. [註 (고주몽)고구려 때는 천하의 중심지라는 뜻인 高九黎로 적지 않고 高句麗 또는 高麗로 적었다. 이는 (고주몽)고구려가 건국될 당시 세력이 약하여 요하 요하 동쪽까지 진출하여 한군현을 두고 있는 한나라를 자극하지 않기 위하여 한나라가 적은 명칭대로 고구려로 적은 것을 그후에도 계속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추모 고구려 건국시기(고주몽)고구려의 건국시기에 관하여 B.C 58년으로 보는 견해, B.C 37년으로 보는 견해, 고주몽은 고구려 역대 왕 중의 1명에 불과하지 고구려의 시조가 아니라고 보는 견해 등이 있다.1. B.C 58년으로 보는 견해[환단고기]고구려국본기에는 고주몽이 B.C 58년에 고구려를 건국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것은 동부여에서 망명하여 고무서 단군의 유언에 따라 골본부여 단군에 오른 시기를 말한다.[환단고기]에는 해모수계 고구려의 역사는 북부여기 상권에, 동명계 고구려의 역사는 북부여기 하권에 각 적혀 있고, 고주몽 고구려의 역사는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 적혀 있다.2. B.C 37년으로 보는 견해[삼국사기]고구려본기 동명성왕기에는 고주몽이 B.C 37년에 고구려를 건국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는 부여인들이 반대로 북부여(골본부여)에서 나와 환인지역에서 나라를 세운 시기를 의미한다.(고주몽)고구려의 건국시기는 [환단고기]고구려국본기에는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을 중시하여 고주몽이 고구려(북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때인 B.C 58년으로 적혀 있는 반면에,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동명성왕기에는 고주몽이 이웃나라를 정벌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기른 때인 B.C 37년으로 적혀 있다.3. 고주몽은 고구려 역대 왕 중 1명에 불과하지 고구려의 시조가 아니라고 보는 견해가. 당나라 시어사 가언충의 견해[삼국사기]고구려본기 보장왕 27년조에 의하면 당나라의 시어사 가언충은 B.C 232년에 고구려가 건국되었다고 보았다. 가언충은 해모수계 고구려, 동명계 부여, (고주몽)고구려를 모두 같은 나라로 보았고, 고주몽은 고구려 역대 왕 중 1명에 불과하지 고구려의 시조가 아니라고 보았다.나. 신라 문무왕의 견해문무왕은 동명계 고구려와 (고주몽)고구려를 같은 나라로 보았고, 고구려의 역사를 동명계 고구려부터 (고주몽)고구려까지 약 800년(B.C 108년+A.D 668년=776년) 가까이로 보았다. [註 B.C 108년은 한나라의 침략에 대항하여 동명이 일어난 해이다.]4. (고주몽)고구려를 고구려의 별종으로 보는 견해지나사서인 [삼국지]나 [후한서]에는 (고주몽)고구려가 고구려의 별종으로 적혀 있다.「구려를 일명 맥이라고 부르며 별종이 있다. 작은 강을 끼고 살고 있어 소수맥이라 한다. 句麗 一名貊夷 有別種 依小水爲居 因名曰小水貊」後漢書「고구려는 구려에서 나라를 세웠다. 큰 강을 끼고 살고 있다. 서안평현 북쪽에 작은 강이 있는데, 남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구려의 별종이다. 高句麗 句麗作國 依大水而居 西安平縣北有小水 南流入海 句麗別種」三國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