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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ㅇㅇ 71.***.55.48 298

    중국인들은 ‘고사리’가 한낱 ‘풀’이었다
    기사입력 2020-04-24 08:41:42기사수정 2020-04-24 08:42

    황광해의 ‘食史’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채소(菜蔬)는 ‘산채’와 ‘야채’를 모두 아우른다. 산나물, 들나물을 모두 아우르면 곧 채소다. 소채라고도 한다. 야채는 일본식 표현이다.

    재미있는 것은 산채(山菜)다. 우리만 널리 쓰는 표현이다. 일본, 중국은 산채라는 표현을 널리,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 일본, 중국에도 산채는 있다. 그들은 산채를 즐겨 먹지 않는다. 중국은 버섯 등을 제외하고 거의 먹지 않는다. 일본도 마찬가지. 버섯과 몇 가지 산나물을 먹는다.

    한국은 일상적으로 산나물을 먹는다. 곤드레나물로 비빔밥을 만들고 취나물은 곰취, 참취, 수리취, 단풍취, 미역취 등으로 가른다. 이름도 외우지 못할 숱한 산나물을 일상적으로 먹는 나라는 우리가 유일하다.

    산마늘, 명이나물이 대유행이었던 적도 있다. 웬만한 고깃집에서는 아직도 명이나물절임을 상 위에내놓는다. 국내 생산량이 부족하니 수입도 많이 한다.

    제사를 지낼 때 고사리를 비롯해 여러 종류의 나물, 산나물을 사용하는 나라도 우리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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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나물은 우리 민족 특유의 음식문화

    한국일보 기자였던 故홍승면(1927 ~1983년) 씨는 “산나물 문화는 우리 핏속에 녹아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만주, 간도에는 여러 민족이 살았다. 그중 한국인을 찾아내는 방법은 간단했다. 이른 봄 바구니를 끼고 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모두 한국 처녀, 아녀자들이었다.”(‘대밭에서 초여름을 씹다’, 삼우반, 2003년)

    봄에 산나물을 채취하는 이들은 한국인이 유일했다. 우리는 냉이, 달래, 쑥을 캐며 봄을 맞았다. 흔히 산나물을 가난, 궁핍함, 초근목피(草根木皮)의 상징으로 여긴다. 틀렸다. 당시 간도, 만주 일대에는 여러 민족이 모여 살았다. 한국, 일본인들뿐만 아니라 원주인인 중국인, 중앙아시아인들, 러시아 사람들까지 모여들었다. 먹고살기 어려워 먼 곳까지 온 사람들이다. 대부분 가난했다. 살림살이는 그저 그만했을 것이다. 궁핍한 살림살이다. 유독 한국인들만 더 가난했다고 이야기할 근거는 없다. 그중 한국인들만 봄철이면 산나물을 뜯으러 다녔다. 산나물은 초근목피의 상징이 아니다. 산나물은 우리 민족 특유의 음식문화 중 하나다.

    오래전에는 중국, 일본인들도 산나물을 먹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중국, 일본의 산나물 문화는 사라졌다. 중국인들은 버섯을, 일본인들은 들나물을 주로 먹는다.

    재미있는 것은 산나물 중 ‘고사리’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사육신 성삼문은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죽기 전 그는 시조를 남긴다. 제목은 ‘수양산(首陽山) 바라보며’다. 소재는 중국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 먹으면서 굶어 죽은 백이, 숙제의 이야기다. 고사리를 캐 먹었다고 ‘채미가’(採薇歌)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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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양산(首陽山)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恨)하노라./주려 죽을진들 채미(採薇)도 하난 것가./비록애 푸새엣 것인들 긔 뉘 따헤 났다니.

    이제(夷齊)는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가리킨다. 은나라 고죽군의 아들이었던 두 사람은 주 무왕이 은 주왕을 정벌하는 것을 말린다. 무왕이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고 은나라를 정벌하자 수양산에 들어가서 고사리를 캐 먹다가 굶어 죽었다. 곧은 충절과 청렴의 상징이다.

    백이, 숙제가 먹은 것은 ‘산나물 고사리’가 아니라 한낱 ‘풀’이었을 것이다. 고사리를 먹을 것으로 여겼다면 굶어 죽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중국인들은 우리처럼 고사리를 상식(常食)하지 않는다. ‘고사리를 먹었다’와 ‘굶었다’가 같은 뜻이다. 고사리는 먹을 것이 아니었다.

    성삼문은 한글 창제 당시 북경을 갔다. 이때 이제의 묘를 지난다. 이제의 묘를 보고, 남긴 시가 있다. 백이, 숙제를 기리는 글이다. 내용은 ‘수양산 바라보며’와 비슷하다.

    • ㅇㅇ 71.***.55.48

      그냥 답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위의 기사는 황광해 라는 사람이 쓴 기사인데요. 맛 칼럼니스트인가봐요.

      그런데 백이와 숙제가 누군지를 잘 모르네요. 사실상 백이와 숙제는 중국 한족이 아니라 우리와 가까운 동이족이었거든요. 그래서 저 사람들은 고사리 뜯어먹을줄을 알았지요. 고사리가 풀이 아닌것을 알았던 거에요. ( 사실 은나라=상나라와 주나라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레요. 그러니 백이와 숙제가 우리민족이라네요. 그러니 우리가 산나물 뜯어먹는게 아주 오래된거고, 게다가 아주 ‘독창적’인 문화인가봅니다. 한번도 이런걸 독창적일거라 생각해본적이 없었는데 말이죠.) 상나라는 은나라라고도 하는데 사실은 상나라의 수도가 은허라서 은나라라부르지만 그건 맞지 않고 상나라가 더 맞는 말이랍니다. 그런데 저 백이와 숙제는 상나라 아래 고죽국인지 하는 제후의 아들들이라네요. 그러니 동이족들이 맞지요. 고죽국은 후대에 이르러 고구려의 모태라고 삼국사기엔가 나온다고 하네요. 근데 위키페디아보면 이 백이 숙제가 만주쪽이 아니라 중국 북경 보다 훨씬 서쪽으로 나오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알던 고구려도 여러 고증에 의하면 북경근처까지 국경선이 있는게 맞다고 합니다.

      산나물 뜯어먹는게 동이족의 특징이라는거 아시나요? 가만 따져보면 동이족과 중국의 화족(한나라이후 사마천은 이들을 한나라 한짜를 써서 한족이라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대한민국이라고 쓰는 ‘한’은 마한변한진한의 ‘한’이 기원인줄 알았는데 그보다 훨씬 전부터 동이족이 쓰던 거라네요.)은 민속에 큰 차이를 보여주네요. 정월보름의 민속풍속도 사실은 중국과 우리나라가 다르고요, 정월초하룻날 해돋이를 하는 풍속도 동이족의 독특한 풍속이라네요. 왜냐하면 동이족이 ‘해’를 숭상했데요. 그래서 “삼족오-고구려”와 “봉황-백제”이라는 새가 매개체로 등장한거라네요.
      난 지금까지 봉황이나 용이 다 중국에서 온거인줄 알았거든요. 근데 원래 봉황도 그렇고 용도 그렇고 동이족 문명에서 나왔는데 용은 한족들이 채용해서 가져간거라네요. 봉황은 백제국이후로 계속 전승된거구요.

      우리는 워낙 당나라 이후 특히 명나라 조선시대에 하도 중국것을 다 받아들여와서
      한짜로 되있거나 대부분의 우리의 전통이 중국것인지 우리것인지 뒤죽박죽이 되어서 뭐가 뭔지 모르는게 많은데요. 왜냐면 한짜말 자체도 중국거라는 생각에 지레 이것도 저것도 우리것이 아닐것이라 착각하는것이죠. 근데 아직도 우리만의 독창적인게 아주 많은가봐요.
      심지어 한짜 자체도 동이족이 발명해낸거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주장의 근거는 한짜의 원시 상형문자를 풀어낼때 동이족의 민속들의 모습으로 그 상형문자의 원형모양이 풀어지는데 한족의 풍속으로는 그 모양이 풀어지지가 않는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