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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710:51:02 #1288334무신론자 70.***.81.169 1148
질문 3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그냥 용서하고 그렇게 선포하면 되는것이지, 왜 예수님을 보내서 고통받고 죽게하고 이런 과정을 거쳤나요? 제가 보기에 이것은 제물로 죄없는 동물(어린양같은)을 희생 함으로서 내 죄를 씻는다 하는 원시적 의식에서 나온것 같은데, 죄인이 죄값을 받으면 되지 죄없는 다른 어떤 생명이 죄값을 대신 치르는게 맏다고 보시나요? 내가 죄를 짓고 내옆에 죄없는 사람에게 “너 나대신 죽어” 이러면 말이됩니까? 희생될 사람이 그걸 원한다해도 그건 정의가 아니라고봅니다. 어차피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 하나님이 만든 rule 인데, 그냥 인간의죄 용서하면 될걸, 아들인 예수를 보내 고통받고 죽게하고.. 이게 왜 필요한지.. 거기다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라고 합니다.. 근데 예수님은 또 하나님께 기도하고.. 완전 꼬이고 꼬이네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신을 보내서 인간을 자신으로 부터 용서 받도록 자신에게 기도했다는 예긴데 도저히 이게 뭔예긴지.. 제 생각엔, 기독교에서 예수님을 섬기고 싶지만 자기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에 어긋나니까 그걸 정당화 하기위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다” 라고 억지로 짜 맞출려고 하는데, 그러다 더 꼬인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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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새 계명은 능히 옛날 십계명을 바꾸고도 남는 계명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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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돌에다 기도하고 나무에다 기도하는것 보단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람을 믿고 따르는게 훨 낫지 않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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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기독교 질문1에 comment를 달았던 사람입니다. 이건 기독교의 핵심과 관련이 있는 좋은 질문인 것 같습니다.
먼저 성경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크게 두가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 두가지는 바로 거룩함과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사랑만 강조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대하여는 간과할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거룩함은 다른 말로 정의로움(Justice)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이 Justice는 이 사회를 지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lawless한 무법천지가 되겠죠. 그리고 이 정의가 깨어졌을 때에는 그에 상응하는 심판(judgment)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잔인하게 나의 부모님을 살해했는데, 하나님께서 그냥 그 살인자를 용서해주셨다라고 생각해보십시요. 그리고 그 살인자는 뉘우치지고 않고 인생 즐기며 살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울분이 터지고 억울합니까.. 그런 하나님이라면 세상을 통치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의에 기초하여 죄에 대하여는 반드시 심판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나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하여 죄값을 치룰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죄인이 다른 죄인을 위해 대신 죽어서 죄값을 치룰수가 없습니다. 살인죄를 지고 감옥에 갇힌자가 소매치기로 감옥에 갇힌자를 위해 대신 감옥살이를 해줄수 없습니다. 둘다 감옥에 갇혀 심판받고 있는 상태입니다. 오직 아무 죄가 없는 자만이 대신 그 심판을 대신하여 질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거짓을 말했고, 네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라고 했지만 탐하였고, 간음하지 말라고 했지만 성적타락의 죄를 지었고, 네 이웃을 네몸같이 사랑하라고 했지만 내 몸 사랑하기에만 바쁠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성육신 하셔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분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온전히 다 지키며 sinless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만이 세상의 죄에 대한 심판을 대신 받고 희생하실 자격이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두 성품인 정의와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 같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정의와 사랑이 모두 만족이 되었습니다. 세상사람의 죄에 대한 심판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정의가 만족이 되었고, 동시에 자기의 하나뿐인 독생자 예수님을 이렇게 세상 사람들을 위한 제물로 드림으로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원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를 위해 죽어라’ 라고 희생을 강요한다면 이것은 사랑도 아니고 정의도 아니죠. 그래서 성경에서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죄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십자가의 고통과 죄에 대한 심판의 무게를 아시면서도 죄인들을 사랑하기에 그들을 구원하기에 대신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의 정의와 사랑이 우리에게 영향을 갖게 하기 위해선 반드시 나의 죄에 대한 뉘우침과 이 십자가를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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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Y 님,
그럼 죄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값을 치를 자격이 있고 자발적으로 한다면 그것이 정의 라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기가막힌 막장논리네요. 이런 twisted sense of justice 가 기독교를 혐오하게 만드는 이유중 하납니다. 이런 원시적 사고 방식이 석기시대 사람들이나 미계인들이 “깨끗한” 재물을 신에게 바치는 의식을 치루는 바탕에 깔려있는듯 합니다. 그래서 양을 피흘리게해 죽이고 어떤 문명에서는 처녀를 제물로 바치고 이런것들이 그런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읍니다. 저는 단지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이 종교라는 명목아래 그런 사고 방식을 갇고 산다는게 놀라울 뿐입니다.-
아.. 먼저 막장논리처럼 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공대 출신이라 글쓰기에 약합니다.
저는 이것을 정의와 심판의 논리적 구조속에서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정의가 깨어지면 이에 상응하는 심판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정의를 어긴 사람이 당연히 심판을 받아야겠죠. 그런데 대속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대신하여 책임을 지고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옛날 그리스지방에 Zaleucus라는 통치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간음하는 자는 심판으로 두 눈을 파버리는 법령을 발표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아들이 간음죄를 저질렀습니다. 자기 아들이라고 그냥 용서하자니 정의가 서지가 않고, 그렇다고 너무나 사랑하는 아들의 두눈을 파버리자니 자신의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래서 재판대에서 아들의 한쪽 눈대신에 자신의 한쪽 눈을 빼버리라고 해서 반정도의 대속을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런 엉터리가 어디있어? 라고 하기 보다는, 정의가 올바르게 실행이 되었고, 동시에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보았다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죄에 대한 심판은 영원한 죽음과 지옥입니다. 이렇게 죄가운데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의 대속은 반쪽이 아니라 온전한 대속으로 내가 대신 하나님의 형벌을 받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나에게 형벌을 요구할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전부 대속했으니까요. 요구한다면, 똑같은 죄에 대하여 두번의 심판을 내리는 것이기에 정의를 깨버리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것을 채무와 빚탕감이라는 비유로도 종종 설명을 합니다. 내가 평생 값을 수 없는 빚에 허덕이며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는데, 이런 나를 누군가 불쌍히 여기어, 자신의 자비로 대신하여 빚을 전부 갚아주어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줍니다. 내가 못하니까 다른이가 대신하여 자기의 것을 희생하여 나를 빚으로부터 살려준것입니다. 여기서 빚은 다 갚았으니까 정의는 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나는 빚탕감을 해준이에게 큰 감사의 마음이 생깁니다.
사족이지만 영화 헝거게임에서 사랑하는 동생을 대신하여 자발적으로 죽음의 경기에 나가겠다는 그 누나가 생각이 나네요. 대회 주최측에서는 게임에 참가할 사람이 있으니 룰이 깨어지지 않았고, 이를 본 사람들은 그 누나의 희생적인 사랑과 용기에 감동을 합니다.
원글님 말씀처럼, 옛날에 동물제사나 사람을 받치는 제사가 있었습니다. 사람을 받치는 제사는 사람이 얼마까지 악해질수 있나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대신 구약성경에는 동물제사가 나옵니다. 그러나 성경은 동물제사 자체가 사람을 깨끗게하는 효력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는 죄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을 remind해주고 장차 오셔서 온전한 대속제물로 죽으실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개인적으로도 나의 영혼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동물희생은 너무 싸다고 느껴집니다. 심판을 대속하기 위해선 적어도 1:1 value matching이 되거나 더 값어치가 있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넘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원글님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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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Y 님 정성스런 답변 감사합니다. 글을 읽으면서 곤곰 생각하게 되는부분이 몆가지있었읍니다. 같은 공대 출신이라니 반갑습니다.
그리스의 통치자의 예를 드셨는데, 제생각엔 아주 이기적인 왕이란 생각이듭니다. 아들이 그죄를 짓기전에 수많은 사람들을 cruel and unusual punishment 로 다스려 놓고, 막상 자기자신에게 닥치니 룰을 바꾼다.. 이경우에는 애초에 형벌이 지나쳤음으로 이 이치에 맞지않는 잔인한 형벌을 폐지하면 그만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망신 스럽겠지요 그러나 정의를 위한다면 이런 극악한 형벌을 애초에 만들지않았어야하고 이미 만들었다면 더 피해가 나기전에 폐지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지옥을 만들지 말았어야하고 나중에라도 없애면 될것을..) 그리고 이 예가 하나님의 이야기처럼 되려면 형벌을 받는 사람들이 모두 아들이어야합니다. (예를 들어 아들 다섯이 있는데 간음하는 아들은 눈알을 뽑는 법을 만들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 모든 인간은 아들 같은 존제니까요. 그러면 처음 두 아들은 눈을 뽑다가 세째 아들때 자기눈을 뽑았다.. 이런 예가 적합합니다. 그렇다면 이 왕은 거의 정신병자 수준이지요.
또 빛갚음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누가 나한테 빚을 졌으면 그빚을 탄감 해주면 됩니다.. 그 빚을다른 사람이 대신 갚아야한다면 그건 용서도 사랑도 아닌 그냥 사채업자고요.. 사랑의 하나님이라 볼수없지요.. 거론한 예에 이외도 반박할점이 몃가지더 있지만 생략드립니다. 저도 공대 출신에 어려서 미국와서 글쓰는건 아주 잼뱅이라서요.. -
예를 들어, 한1000년쯤 전에 사람들에게 핸드폰에 대해서 설명했다면 과연 사람들이 이것을 이해했을까요? 절대로 이해 못했겠지요. 같은 맥락으로 2000년 전에 하느님이 인간들에게 내가 너의 죄를 사하겠다라고 말했다면 인간들이 이해했을까요? 절대로 이해 못했겠지요. 그래서 동정녀 마리아가 나오고 예수가 나오고 십자가도 나오고 부활도 나오고…여러가지 사건이 진행되면서 사람들이 조금씩 조금씩 기독교(하느님)에 대해서 알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이 제작자겸 감독으로서 만드시는 한편의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 좋은 분도 나오고 나쁜 놈도 나오고 행복한 사건도 많고 불행한 사건도 많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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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적절한 비유의 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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