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큰누난
나보다 따악 11살 위지만
지금도 큰누난 내게
16살,
꽃이자 천사자 선녀다.
.
.
.
.
당신출셀 했다는
사회지도층인사들과
그들을 지도하는 지도층들은
모두가 다농부의 아들
들였다.
심져
소설속 주인공을 뽑는 오디션에서도
농부의 아들여야만
서류전형을 통과할 수 있었고거기서 또 천대일의 경쟁률을 뚫고 발탁될려면
반드시 조건이 하나 따라 붙었는데건,
농부의 아들이되
가난한 농부의 아들여야했다.글쟁이들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아니면
책속에서도 성공이나 출세를 안 시켜 주었었다.사회진출
을 앞둔 난
내 인생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고
진로를 선택하는데
여러날을 심사도 하고 숙고도 한 결과울아버지의 아들이 되기로 결심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
로 태어날 수 있어서였으며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야만
쉬 성공할 수 있어서였다.
.
.
.
.
.
사회에 나오자마자 난 물었다.엄마,
좨네들은 뭐야?
왜 좨네들이 날 뚫어지게 봐?“응, 얘가 네 큰누나고, 얘가 네 큰형이고, 얘가 네 작은 누나고, 얘가 네 작은형야.”
아무리 형제요, 가족이요, 오누이라도 그렇지 쪽팔리게.
엄만 날 나체로
퍼대기 위에 뉘어 놓은 터라누나들을 보는 순간
성적 수치심을 느껴다리를 오므리곤
거시기 위에 손을 얹었는데
얼마나 큰지
왼손으론 부족해
오른손을 불러 가려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
.
.
.
.
사회에 진출해서
처음으로 둥지를 튼 곳이 우리집이란 곳였고
우리집을 점점 알아가는 과정에서
굉장히 화목한 집이단 걸 알았다.아버지는 엄마를 무척 사랑했고
그래선지 술만 마시면 엄말 팼는데
너무나 사랑했기에
열 대 때릴 것도
가슴이 나약하고 여리셔서
차마 열 댈 채우지 못 하고는
꼭 두 세 대 정돈 탕감을 해 줬다.절제력 또한 대단해서
식구들이 개로 보이면
과감하게 거기서 딱, 멈추곤
막걸리 잔을 내려 놓았다.차마
돼지까지로 볼 순 없잖냐는
깊은 뜻이 있었던 거였다.또한 자식들을 너무 사랑해서
매일매일 자식들과 놀아줬는데
그 놀이가 바로 매놀이였다.그런 아버진 맬 들 때마다
일반 매가 아닌
사랑의 매만 들었고자식들에게 차마 작대기를 들 수 없었기에
작고 조그맣고 간단한
낫이나 쇠스랑, 호맹이, 곡괭이를 들고 우릴 쫓았고우린 말 그대로
좁빠지게 토껴선 산속에 숨어
아버지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살곰살곰 겨들어가는 놀이를
하루가 멀다곤 했었다.
.
.
.
.
.
동네사람들 중
쪽바리들을 통해 일찌기서구 문명
을 받아들인 친일파들은 큰누날
천사
라 불렀고
우리 것은 좋은겨람서
우리 것은 우리가 지켜내얀다던
독립군 후손이나 의병 후손들은 큰누날선녀
라 불렀다.
나는
외국출신인 천사와
국내출신인 선녀를 합해서큰누나라고만 불렀다.
즉, 내게 큰누나란
천사고 선년거였다.
.
.
.
.
.
큰누난 세계에서 제일 아름답고 예뻤다.그렇지만 난 이곳에서
큰누나가
세계에서 제일 아름답고 예뻤다곤 말하지 않겠다.자칫,
팔은 안으로 굽니마니
제식구 감싸기란 오해의 소질 없애기 위함이다.무튼,
큰누난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줄곧 올 수로 1등만 해선
두각이란 걸 나타내기 시작했다.동네사람들과 선생님과 면장은
큰누날 영재라고 불렀다.하도 뛰어남에
소문은 금세 발도 없이 천 리를 갔고
소문을 탐색하고 있던
내로라 하는 전국 각처의 산업체의 스카우터들은
일찌감치 누나를 서로 스카웃하려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접근하여
뒷구멍으로 불법거래를 자행하며
엄청난 제의를 해 왔다.세계 석학들도 감히 하지 못 한 걸
큰누난
6학년 2학기에
당당히 조기 졸업이란 걸 해 냈으니
그럴 만도 했다.그러다 부산의 어느 산업체의 스카웃 제의에
부모님과 변호사의 입회하에
큰누난 싸인을 하게 된다.
.
.
.
.
.
추석이나 구정이 되면
누난 내 선물을
한보따리 싸들고 옴을 잊지 않았고
그러던 어느핸가 누난 내게“칼아,
누나가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우리 칼이랑 식구들 모두 강변에 가서 살자아?”싫어.
“왜?”
아, 그냥 싫어.
그러다 한 핸 물어봤다.
그 강변이 어딘디?
“음, 금모래 은모래가 마악 반짝이는
부여에 있는 백마강변.”그럼 더 싫어.
그렇게 유명하다는 서울이란 곳도 몰랐을 땐데
그렇게 안 유명한 부열 알 리 없어막연히 부연
300억 광년이나 떨어진 곳일 거라 여겨져
끔찍했기 때문였다.
.
.
.
.
.
돌이켜 봄 누난
부여의 백마강에서
삼천궁녀의 일원이 되고팠던 것 같다.아버지의 사랑의 매,
못 배운 한,
직장생활에서의 고단함과 고달픔.
어린 나이에 멀고먼 타지에서 맞게 된 두려움과 외로움.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아닌
딸로 태어나선 성공할 수 없다는 현실,
잃어버린 꿈, 희망.그래서
절망.
그리고
좌절.걸 모두 안고
꽃으로 지고싶었는지도 모를 일였다.
.
.
.
.
.
그 날,
추석을 쇠러 온 누난
내 선물 보따릴 풀다말곤퍽,
그대로 마루위로 쓰러졌다.
.
.
.
.
.
엄마!!!누나봐.엄만 이미 노랗게 무너져 내린 하늘을
양손과 머리로 떠받치곤“얼릉 아부지 찾아와 이놈아.”
동네는 수근거릴 틈도 없이
금세 바삐 돌아갔고이장은 니약까에 누나를 태우고
차를 잡겠다고 신작로로 달렸으며주막에선 아버지가
오늘저녁에 엄마와 우릴 팰
체력을 안배하고 있었다.아버지, 큰누나가 거시기해서……
술은
깨는 게 아니라
확 달아나는 거란 걸난 아버지를 보면서 알았고
아버진
하얀 고무신 한 짝을 잊곤 니약까를 쫓았다.여기까지가 내 목격자 진술이다.
.
.
.
.
.
며칠 후.아버지와 엄마의
대화 녹취록이 공개되었는데,“개노무 색휘들,
링게루 하나 팔에 꽂아놓고 내비두다
둬 시간이나 지나서야 큰 병원으로 가보라니.살면서 개소리란 개소린 다 들어봤지만
그렇게 참신한 개소리는 첨 들어 본당게?
쳐죽일색휘들.바로 큰병원으로 가라고 했으면
살 수 있었을텐데,
응급처치만 했어도
살 수 있었을텐데
살 수 있었을텐데……”논산 그 병원에서 한참을 머물다
다급히 큰 병원으로 가라 했고
대전 그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을 땐이미 누난 죽은 후였고.
지금같으면 논산 그 병원에 쫓아가선
의사고 나발이고고발이니 마니
돌팔이니마니
패죽이니 마니 했겠지만당신
엄마 아버지의 기준은
대통령 다음으로 높은 냥봔이선생님,
그 다음 높은 냥봔이
의사 선생님였던 거였다.감히 하극상은 상상을 못 하셨던 거였다.
난 지금도 큰누나가 뭘로, 뭔 병으로 죽었는 질 모른다.
녹취록에
증거가 될 만한 것이 발견되지 않아서기도 하지만부모님은 감히
그들만의 언어.
선생님들만이 사용하는 의학용어를머리에 담아둔다는 건 불경스런 일이라 여겨
대전에서 집에 오는 동안
다 털어버렸던 걸로 짐작이 갈 뿐,따로 부모님을 밖으로 불러내어
큰누나가 왜 죽었대?
물어 볼 수가 없어서 그냥 넘어갔지만
그 의학용얼 풀이한 걸로 짐작이 가는
부모님의 대활 몇 번은 들은 것도 같다.“거시기가 아파각고.”
무튼,
그 때 알았다.
죽을 땐 쌈빡하게 죽어얀단 걸.쌈빡하게 죽으면 몇 년 안 가지만
‘살 수 있었을텐데’
를 남기고 죽으면
산 자의 가슴에 평생, 평생 한으로 남는다는 걸.저승사자년하고 바람이 나
그 년 따라 집을 나가실 때까지도아버진
“살 수 있었을텐데”
하셨으니 말이다.
.
.
.
.
.
그때 누나 소원대로강변에 가 산다고 하지 않곤?
물으신다면.
나도 그러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도 쬐끔은 사람이고 싶었다.
그래서 반대했다.그 어린나이에도 난
조강지처 버리는 놈은 사람도 아니라고 여겼었기에
나와 각시되어 놀던
봉숙이.
조강지처인 봉숙이를 버릴 수 없어서였다.
300억 광년이나 떨어진 곳으로 가면
제아무리 하늘을 날고 긴다는 견우직녀도
못 만날 거라 여겨서였었다.
.
.
.
.
.
지금도 추석이 다가오면
자동으로 큰누나가 생각나고그럴 때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곡이자
그들을 있게 한 출세곡인이 노래를 가만히 불러본다.
백마강 다알 바아~ㅁ에
물새애가 우~우~우~우러~~~그 해
추석 전날였고
보름달이 구름에 가려
흐느끼기에 좋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