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 대한 질문3

JY 108.***.141.80

아.. 먼저 막장논리처럼 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공대 출신이라 글쓰기에 약합니다.

저는 이것을 정의와 심판의 논리적 구조속에서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정의가 깨어지면 이에 상응하는 심판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정의를 어긴 사람이 당연히 심판을 받아야겠죠. 그런데 대속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대신하여 책임을 지고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옛날 그리스지방에 Zaleucus라는 통치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간음하는 자는 심판으로 두 눈을 파버리는 법령을 발표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아들이 간음죄를 저질렀습니다. 자기 아들이라고 그냥 용서하자니 정의가 서지가 않고, 그렇다고 너무나 사랑하는 아들의 두눈을 파버리자니 자신의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래서 재판대에서 아들의 한쪽 눈대신에 자신의 한쪽 눈을 빼버리라고 해서 반정도의 대속을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런 엉터리가 어디있어? 라고 하기 보다는, 정의가 올바르게 실행이 되었고, 동시에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보았다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죄에 대한 심판은 영원한 죽음과 지옥입니다. 이렇게 죄가운데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의 대속은 반쪽이 아니라 온전한 대속으로 내가 대신 하나님의 형벌을 받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나에게 형벌을 요구할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전부 대속했으니까요. 요구한다면, 똑같은 죄에 대하여 두번의 심판을 내리는 것이기에 정의를 깨버리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것을 채무와 빚탕감이라는 비유로도 종종 설명을 합니다. 내가 평생 값을 수 없는 빚에 허덕이며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는데, 이런 나를 누군가 불쌍히 여기어, 자신의 자비로 대신하여 빚을 전부 갚아주어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줍니다. 내가 못하니까 다른이가 대신하여 자기의 것을 희생하여 나를 빚으로부터 살려준것입니다. 여기서 빚은 다 갚았으니까 정의는 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나는 빚탕감을 해준이에게 큰 감사의 마음이 생깁니다.

사족이지만 영화 헝거게임에서 사랑하는 동생을 대신하여 자발적으로 죽음의 경기에 나가겠다는 그 누나가 생각이 나네요. 대회 주최측에서는 게임에 참가할 사람이 있으니 룰이 깨어지지 않았고, 이를 본 사람들은 그 누나의 희생적인 사랑과 용기에 감동을 합니다.

원글님 말씀처럼, 옛날에 동물제사나 사람을 받치는 제사가 있었습니다. 사람을 받치는 제사는 사람이 얼마까지 악해질수 있나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대신 구약성경에는 동물제사가 나옵니다. 그러나 성경은 동물제사 자체가 사람을 깨끗게하는 효력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는 죄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을 remind해주고 장차 오셔서 온전한 대속제물로 죽으실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개인적으로도 나의 영혼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동물희생은 너무 싸다고 느껴집니다. 심판을 대속하기 위해선 적어도 1:1 value matching이 되거나 더 값어치가 있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넘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원글님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