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패망과 독일이 주는 교훈 – 퍼옴.

  • #103374
    북진통일 151.***.24.59 3120

    http://www.journalog.net/vhrvkwjsans/44007

    우리사회에 종북숭김주의자들이 얼마나 있을까 ?


    우리사회에 종북숭김주의자들이 있을까? 없을까? – 반드시 있다.

    있다면 그 수는 얼마나 될까?

    가-그동안 수십년동안 직,간접의 경로로 북한의 工作金을 받았거나 현재 받고 있는 간첩(프락치)수준의 종북숭김주의자들이 사회 각처에 2-3만명 이상 될 것임.(이게 종북숭김주의자임, 우리사회 정치권, 공직 등 상위층 도처에 포진해 있을 것임) -증거가 없어서 못잡는 것이 대부분일것.


    나-戰爭이 일어나거나 暴亂이 일어나면 전쟁하지 말자고 하면서도 우리를 향해 죽창을 들 수준의 종북숭김주의자는 전국민의 10-20% 이상이 아닐까.(선동에 취약한 하위 무산계층 등 위주, 특히 골수 노조, 사회단체들….포함)


    다-적극적으로 종북숭김주의자들에 저항하지 않는 소위 자칭 진보 또는 좌빨수준의 종북숭김주의자는 전국민의 20-30%이상(멋도 모르고 진보로 포장한 좌파가 옳은 줄 알고 있는 일반 국민들..포함)….이 아닐까..


    만약 戰爭이 일어나거나 暴亂이 일어나면 위 ‘가, 나’ 는 즉시 敵이 될 것이고 ‘다’는 기회주의적 행태를 보이다가 有利한 쪽에 붙을 것이다.


    戰爭이 일어나거나 暴亂이 일어나면 우리의 우수한 國力과 戰力으로 상대를 쉽게 제압할 것이다?  천만의 말씀이다.


    유사시에는 거의 거지수준의 빨갱이 군대 때문이 아니라 위 ‘가’항의 내부빨갱이들 때문에 우리 사회는 戰意를 상실하며 중심을 잃게 될 것이고 ‘나’항의 내부빨갱이들의 깽판으로 自中之亂으로 순식간에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內部빨갱이들 단속을 더욱 철저히 해야 하는데…

    우리 내부에는 빨갱이가 없다고?
    5천만 국민 중에 빨갱이가 하나도 없다고?

    있어 봤자 몇 명일 것이라고?

    위 ‘가,나,다’ 가 아닐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지만………….천만의 말씀이다..

    아래 글을 심심풀이로 읽어 보시라….


     -베트남 27년전 베트남공산화를 방불케하는 한반도 위기-

             베트남 공산화 과정을 답습하는 한반도 정세!


    월남 패망 현장 목격자의 악몽


    …………………………………………………………


    이 글을 쓴 이대용 육사총동창회장은 월남 패망 당시 주월 한국대사관 경제 담당 공사로서 월남 패망 과정을 지켜보았고, 월남 패망 후 월맹군에 체포돼 5년동안 억류 생활을 한 경력이 있다. 李회장은 「요즘 자꾸 사이공 함락장면이 꿈에 나타난다」면서「베트남과 한국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일란성 쌍둥이」 라고 말했다.


    李회장은 「대통령과 학자, 지식인들이 우리와 역사 문화적 배경이 다른 독일에서 통일의 교훈을 찾을 것이 아니라 월남 패망을 연구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라고 말했다. 다음은 李회장의 증언을 정리한 것이다.




    월남과 한국은 일란성 쌍둥이


    우리와 월남의 역사는 너무나 닮은꼴이다. 그래서 평소 나는 한국과 월남을 일란성 쌍둥이라고 표현한다. 우리가 역사를 표현할 때 흔히 「반만년 배달민족」 이라고 하는데, 월남은 「반만년 황룡(黃龍)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세계사적으로 보아도 국가체제를 이룬 역사적 시기도 비슷하고, 중국이 팽창하면 조공(朝貢)을 바치다가 중국이 혼란에 빠지면 자주독립을 유지하는 것도 비슷하다. 중국의 주변민족으로서 끝까지 한족에 동화되지 않고 살아온 점 역시 같다.


    월남이란 지명은 중국 전국시대에 월족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세운 나라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계에서 과거제로 관료를 선발하는 문치주의의 나라는 그 제도의 본고장인 중국을 제외하면 조선과 월남이 대표적인 표본이다. 모든 역사와 인명을 한자로 기록한 것도, 중국의 주변부에서 민족이 소멸 당하지 않고 생존한 것도 양국이 비슷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한국은 한번 성립된 왕조는 그 수명이 보통 400∼500년인데 비해 월남은 120년으로 우리보다 상당히 짧다는 점이다. 그것은 월남 민족이 우리 민족보다도 분열이 더욱 심했다는 뜻이다.


    중국의 지배권에 있다가 식민지를 경험한 것도 비슷하며, 식민지에서 해방될 때 남북의 허리가 잘려 분단된 사실, 그리고 북에는 공산정권, 남에는 자유 민주정권이 수립된 것 역시 비슷하다. 양측이 무력을 동원한 동족상잔의 전쟁을 벌인 사실도 동일한 역사적 패턴을 보인다.


    지역 감정이 드센 것, 식민잔재 청산 문제(한국은 친일파, 베트남은 친불 친일·친중파)로 인한 정통성 논쟁, 각 정치 세력 간의 끝없는 분파(分派)와 이합집산(離合集散), 그리고 정쟁(政爭)을 벌이는 것까지도 어찌 그리 닮은꼴인지 모른다.


    1954년 7월21일 프랑스 원정군이 베트남 독립군에게 패해 프랑스가 물러가면서, 제네바협정에 따라 북위17도선 이남에는 자유민주주의 정부인 베트남 공화국(越南)이, 그리고 이북에는 공산정부인 베트남 민주공화국(越盟)이 수립됐다. 이후 월남은 독자적인 힘으로 자주국방을 하지 못해 미군의 도움을 받았고, 결국에는 미군을 중심으로 연합군이 파병돼 공산군과 싸운 것까지 한국과 비슷하다.


    청렴결백했지만 독재로 기울었던 고 딘 디엠 정권이 쿠데타로 쓰러지면서 수차에 걸쳐 군부 쿠데타가 반복되었다. 이 와중에 정권은 부패와 내부분열을 거듭했다. 전쟁에 지친 미국이 월맹과 휴전을 위한 비밀협상에 돌입한 것은 1968년 5월 10일이다. 그 무렵 미국은 직접전비(直接戰費)와 간접전비를 합쳐 연간 495억 달러(1968년), 508억 달러(1969년)를 퍼부었고 미군 병력도 53만 6,000명 선을 파병할 정도로 전쟁의 절정을 이루던 시기다. 미국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 식으로 진행되는 베트남戰에 진저리를 쳤고, 결국 수렁에서 발을 빼기위해 월맹의 레둑토와 비밀협상을 시작한 것이다.


    파리에서 미-월맹 간 비밀 협상이 시작되기 전 해인 1967년 9월 3일에 벌어진 월남 대통령 선거에는. 무려 11명의 입후보자가 난립하여 이전투구(泥田鬪狗) 양상을 보였다. 이 선거에서 당선자인 웬반티우에게 차점(次點)으로 낙선한 야당 지도자 쭝딘쥬는, 선거유세에서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시체는 쌓여 산을 이루고 있다 우리조상이 이처럼 외세(外勢)를 끌어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월맹과 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평화 협상이 가능한데, 왜 북폭(北爆)을 하여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가.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폭을 중지시키고, 평화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주장하며 미국과 월남 국민들의 반전(反戰) 여론을 자극했다. 이처럼 월맹에게 호의적이던 그가 공산군의 프락치였음이 밝혀진 것은 월남 패망 후의 일이다.


    한편 미국과 월맹이 파리에서 비밀 평화 회담을 진행 중인 사실이 알려지면서, 월남 내부에서는 국론(國論)이 두 갈래로 갈렸다. 여당은 강력한 반공정책을 주장하며 평화회담 참여 거부를 주장한 반면, 야당은 앞다투어 포용정책을 들고 나와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회담 참여를 지지했다. 고민에 빠진 월남 정부는 어쩔 수 없이 회담 테이블에 나가야 했고, 1969년 1월 15일부터 미-월맹 2자 회담은 미-월남-베트콩(베트남 인민해방전선. 후에 베트남 임시혁명정부-월맹의 4자 회담으로 확대되었다.



    한쪽에선 평화회담, 다른 쪽에선 대남(對南)공작


    1973년 1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5년여 협상 끝에 베트남전을 종식하는 역사적인 휴전 회담이 열렸다. 이 휴전의 담보를 위해 키신저는 월맹에 40억달러(20억달러는 미국 직접원조, 20억달러는 국제은행(IBRD) 차관)의 원조를 제공, 이것으로 피폐한 월맹의 경제 재건을 돕기로 하고 교전 당사국인 미국 월남 월맹 베트콩(베트남 임시혁명정부) 등이 서명했다.


    美 국무장관이었던 키신저는 보다 확실한 휴전을 담보하기 위해 휴전감시위원단인 캐나다·이란·헝가리·폴란드 4개국을 서명에 참여시켰다. 이리하여 4개국 250명으로 구성된 휴전감시 위원단온 하노이와 사이공, 그리고 휴전선을 감시하게 되었다. 한편 월맹에서는 하반라우 외무차관이 150명의 고문단과 함께 사이공에 체류했다. 일종의 인질 형식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믿지 못한 미국은 영국·소련·프랑스·중공 4개국 외무장관까지 서명에 참여시켰으니, 파리 휴전협정은 4+4+4 즉 무려 12개국이 담보하고 보증한 값비싼 서명문서였다. 그리고 월남과도 방위조약을 체결, 이제 미군은 철수하지만 월맹이나 베트콩이 휴전협정을 파기(破棄)하면, 즉각 해공군력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하고 월남 지상군을 지원키로 굳게 약속했다. 더불어 주월미군이 철수하면서 그 동안 미군이 보유하고 있던 각종 최신 무기까지도 모두 월남에 양도하여, 그 무렵 월남 공군력은 전세계에서 4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처럼 철저한제도와 장치를 마련했기 때문에, 키신저는 주월미군이 철수하더라도 휴전체제가 최소한 10년은 갈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수년간 미국의 골칫덩어리였던 베트남전이 휴전을 맞게 되면서 전세계에는 평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닉슨의 데탕트 정책과 한반도에서 1972년부터 시작된 남북대화 등으로 세계평화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大勢)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파리 휴전협정의 성과로서, 미국의 키신저와 월맹의 레둑토는 1974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그런데 레둑토는 『나는 한 일이 별로 없다. 나보다 평화에 기여한 사람이 많다』며 수상을 거부했다. 이에 대해 세계인들은 그가 월맹의 당 서열 5위였기 때문에, 자신의 위에 있는 지도자들을 염두에 둔 「동양적 겸양의 표시」라고 이해했다. 결국 키신저 혼자만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결국 이 생각은 착각이었다. 그들은 미군의 북폭과 경제봉쇄로 피폐해진 나머지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하자 평화회담에 나섰으나, 그것은 전략은 변함이 없은 채 전술만 바꾼 셈이었다. 레둑토가 키신저와 평화회담을 벌이는 한편에선 1950년대 중반에 수립된 대남 기본전략이 더욱 공고히 다듬어졌다. 그것은 「베트남에서 침략군을 몰아내고 민중봉기를 일으켜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남반부에 창출하고, 무력으로 남반부를 해방시켜 조국통일을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지금도 북한이 견지하고 있는 대남전략과 단 한 치의 차이도 없다.



    월남의 90%를 정부가 지배했지만…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을 때 월남 국토 44개 성(省) 중 12개 성의 곳곳에만 표범의 반점처럼 공산군 점령지가 남아 있었다. 총 인구의 90.5%는 월남이 지배하고 있었고, 나머지 중 5%는 낮에는 월남, 밤에는 공산측이 지배하는 경합(競合)


    지역, 그리고 4.5%는 공산측 지배하에 있었다. 그래서 월남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과 경제력 우위를 바탕으로, 공산측 지배를 월남 내(內)에서 자연스럽게 소멸시킨다는 전략을 세웠다. 휴전 무렵 월맹은 오랜 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매년 80만∼100만t의 식량부족,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맹은 줄기찬 대남공세를 끝까지 멈추지 않았다.


    휴전협정 이전부터 숱한 공산당 프락치들이 월남 곳곳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호치민이 1930년 2월에 창당한 베트남 공산당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의장인 웬후토가 1962년 1월에 창당한 인민혁명당에서 침투시킨 조직원들이었다. 그래서 월남 패망 당시 월남에는 공산당원 9,500명과, 인민혁명당원 4만 명, 즉 전체인구의 0.5% 정도가 월남 사회의 저층(底層)에서 밑뿌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1969년 6월 6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베트남 임시혁명정부로 개편될 당시 이 정부의 법무장관이었던 쫑뉴탄의 증언에 의하면, 캄보디아 국경선근처 빈룽성 내의 지하 땅굴에 있던 혁명정부 청사에는 월남정부의 각 부처와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이루어지는 극비 회의내용이 단 하루후면 상세하게 보고될 정도로 티우정권의 핵심에 공산 프락치가 침투해 있었다고 한다.


    1967년 대선(大選)에서 차점으로 낙선한 쭝딘쥬와, 당시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이 자자했던 녹따오를 위시한 많은 정치인·관료들이 모두 공산 프락치였음이 알려진 것은 월남 패망 후의 일이었다.


    반면 월남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벌어질 때마다 대공(對共) 전문가들이 쫓겨나는 바람에, 월남 대공기관과 정보기관은 형해(形骸)만 남아버렸다. 그들은 대(對)월맹 정보 수집은 말 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월남 내부에 침투한 공산 프락치 검거에조차도 무기력했다.


    한 나라를 망하도록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보다도 그 나라의 정보기관부터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정보기관과 대공기관이 정권의 부침(浮沈)에 따라 평지풍파를 겪으면서, 결국에는 간첩하나 못 잡는 이빨 빠진 고양이로 전락한 사실을 나는 너무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월남 패망 당시, 외적(外敵)이 아니라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무너지는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이다.


    휴전협정 이후 월남은 월맹보다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에서도 월등히 앞서 있었다. 그래서 월남 지도부와 국민들은 상황을 너무도 쉽게 낙관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의 하나 월맹군이 도발하더라도 즉시 미국의 해공군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할 것이고 이후 대(對)월맹 경제 원조도중단하면, (당시) 세계 4위를 차지할 정도로 월등한 월남군 기동력과 화력으로 월맹군의 공세에 당연히 맞설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 누구도 공산군이 남침하리라고 믿지 않았다.


    오랜 전쟁 후에 온 휴전 체제에서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래서 국방과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은 전쟁에 미친, 혹은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았다. 결국 그 믿음이 국방을 소홀히 하도록 하였고, 내부적으로도 극심한 정쟁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1975년 9월에는 월남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정치인들은 대선 승리를 위해 이합집산과 분열, 반목, 대립과 갈등을 유감없이 연출했다. 고질적인 사회악이었던 뇌물과 마약, 매춘과 도박이 정치권의 혼란과 맞물리면서 마치 전염병처럼 전 국토를 휩쓸었다. 정부의 부정부패는 국민의 사기를 떨어뜨렸고, 계층 간 갈등이 조장됨으로써 공산 프락치들의 활동공간은 점점 넓어져 갔다. 결국이 선거가 최후의 자유선거가 되고 말았다.



    정규군 58만 명 중 10만 명이 위장휴가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군내(軍內) 부정부패였다. 당시 월남 정규군은 58만 명이었는데, 이 중 10만 명이 뇌물을 주고 비공식 장기휴가를 받아 대학에 다니거나 취업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장군들이 운영하는 사(私)기업에 파견되어 무보수로 일하는 사례마저 있었다. 이처럼 이름만 있고 실체는 없는 군인들을 가리켜 당시 월남에서는 「유령 군인」, 「꽃 군인」이라 불렀다.


    나는 군재직 시절, 미 육군참모대학에서 훗날 월남대통령이 된 티우씨와 만난일이 있었다. 그후 주월대사관 무관(武官)으로 파견 됐을 때, 티우는 대령으로서 사이공 부근의 사단장으로 재직 중이였다. 그가 쿠데타로 대통령이 되자 박정희 대통령이 나를 다시 월남으로 보낸 것이다. 그래서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티우 대통령과는 속 깊은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비록 독재로 기울기는 했지만 대단히 청렴결백했던 고 딘 디엠 대통령 시절, 월남군은 용맹하게 공산군과 맞서 싸워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그 덕택에 휴전당시 월남은 전 인구의 90%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지도층의 부패였다. 티우 대통령의 사위가 군에 입대했는데, 그는 이름만 군적(軍籍)에 둔 채 외국 유학을 떠나버렸다. 대통령 사위가 그럴 정도였으니, 다른 고관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지도층 아들들은 입대 영장이 나오면 일단 입대한 다음 뇌물을 써서 선진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게다가 월남 지배층은 사리사욕과 부정축재, 황금 만능주의에 빠져 천민자본주의의 극단을 보였다. 반면 「국가에 대한 의무」라는 말에는 코웃음을 치며 등한시함으로써 체제파괴 세력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오늘날 기회가 날 때마다 사회 지도층 인사와 그 아들들의 병역기피 사례가 언론에 공개되는 모습은, 25년 전 월남에서 벌어진 바로 그 일들이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 것 같다.


    후방이 부패와 혼란에 빠지고, 사회에 정의감이 상실되자 일선의 군인들은 「저따위 썩은 정권과 나라를위해 내가 목숨을 바쳐야 하는가」하며 전의(戰意)를 상실했다. 또한 화해와 평화의 분위기가 퍼져나가자 공산군에대한 경계심도 같이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월등히 높은 경제력과 막강한 화력을 가졌던 월남군대가, 식량부족으로 고민하던 월맹군에게 허수아비처럼 붕괴한 가장 큰원인이다.



    시민·종교단체를 좌익이 장악


    한편 이 무렵 월남에서는 천주교의 짠후탄 신부, 불교계의 뚝드리꽝 스님 등이 모여서 「구국(救國) 평화 회복 및 반(反)부패 운동 세력」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었다. 이 산하에 사이공대학 총학생회, 시민단체들이 연합하여 일종의 시민연대를 구성하고, 반부패 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문제는 이 순수한 반부패 운동 조직에 공산당 프락치들이 대거 침투하여, 거대한 반정부·반체제 세력으로 변질시켜 버렸다는 점이었다.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하자, 사이공에는 100여 개의 애국단체, 통일 운동단체들이 수십개의 언론사를 양산하여 월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장섰다.


    목사, 승려, 학생 그리고 좌익인사들이 한데 뒤섞여 반전운동, 인도주의 운동, 순화운동 등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운동단체들을 총동원하여 티우 정권 타도를 외치고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1975년의 월남은 월맹 정규군의 무력침공과 베트콩의 게릴라전에 패배한 것 이상으로 이들 100여 좌익 단체의 선전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이다.


    1974년 10월, 월남에서는 유전(油田)이 발견되어 온 국민이 흥분에 휩싸였다. 나라 전체가 평화 무드에 젖어 있던 상태에서 석유까지 발견되자 사람들은 더욱 자유분방함과 안일주의에 기울어 갔다.


    그러나 바로 그 무렵, 월맹의 하노이에서는 극비리에 남침을 위한 비밀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레준 서기장은 당시 닉슨 대통령 사임으로 어수선한 미국이, 월맹이 남침공세를 펴도 월남 방위공약을 이행하지 않을 것이라며 남침 전쟁의 결정을 내렸다.


    1975년 1월 8일, 월맹군 18개 사단 총병력을 월남 공격에 투입하기 위한 군사력 배치가 개시됐다. 이 총공세를 현지에서 지휘하기 위해 월맹군 육군참모총장 반띠엔둥 대장이 1975년 2월 5일 하노이 공항에서 AN-24기를 타고 극비리에 이륙했 다. 반띠엔둥 대장은 2월 6일 호치민 루트를 타고 중부월남 고원지대의 전략 요충인 반 메뚤의 서쪽 밀림 지대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그가 중부월남으로 잠입한 사실을 기만하기 위해 하노이에서는 그와 비슷하게 생긴 가짜 반띠엔둥이 볼가 승용차를 타고 매일 저택에서 월맹군 총사령부로 출퇴근을 하도록 했다. 반띠엔둥은 배구를 즐겼는데, 운동 시간이 되면 가짜 반띠엔둥이 나와 배구를 하는 등 치밀하게 철저한 위장을 했다.


    그러나 이미 거덜이 난 월남 정보기관은 이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이 무렵 나는 월맹군의 움직임이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고, 티우 대통령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당시 월남군 정예부대는 공수사단과 해병사단이었다. 나는 티우 대통령에게 「지금 월남은 자유라는 미명하에 게릴라들 전쟁터가 됐습니다. 아무래도 조짐이 이상한데 정보기관에서는 이렇다할 아무런 보고가 없으니, 일단은 도지사 소속으로 되어 있는 민병대 병력을 무장시키고 공수사단과 해병사단을 각각 군단으로 강화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고 제안했다.


    그러나 티우 대통령은 허허 웃으면서「지금 우리 정규군 병력이 58만 입니다. 또 미국과의 방위조약이 시퍼렇게 살아 있고, 월맹도 북폭으로 거덜이 난 상태인데 저들이 침략할 힘이 남아 있겠습니까」며 완곡히 거절했다. 티우 대통령은 확고한 반공 지도자였지만 평화에 눈이 멀어 유비무환을 잊었던 것이다. 그의 머리 속에서는, 월맹은 경제가 허약하고 식량과 물자 부족이 심화돼 조만간 붕괴할 체제에 불과한 것으로, 우습게 보았던 것이다.



    우익 ·애국인사 암살


    월남은 몇 개월 후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극심한 혼란상을 연출하고 있었다. 거대 여당이었던 대월당(大越黨)은 대통령직에 눈이 먼 인사들의 탈당으로 분열, 각개약진을 거듭했다.


    오늘날 어떤 정당에서 공천을 못 받았다 해서 뛰쳐나가 자신이 몸담았던 당의 지도자를 공격하는 모습은 25년 전 내가 월남에서 체험했던 정쟁과 어찌 그리도 닮은꼴인가.


    그 무렵 반공(反共)을 외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우익 인사들은 다음날이면 시체로 발견됐다.


    1973년까지 연 평균 무려 840명이나 암살을 당할 정도였다. 티우 대통령이 수상으로 지명하려 했던 유명한 반공지도자


    웬반홍, 사이공대학의 우익 학생 지도자, 그리고 반공을 주장하는 언론인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되면서 지식인과 중산층, 언론은 침묵을 선택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언론과 지식인들이 국가 안보와 반공, 국가 정통성 수호를 외치면, 말과 글과 구호로 무장한 좌파 인사들이 무차별 공세를 펼침으로써 「말없는 다수」들이 침묵하는 상황도 25년 전 월남과 다름이 없다.


    이 와중인 1975년 3월 10일 새벽 2시, 월맹 공산군이 중부월남에서 오래 전부터 침투해 있던 프락치들을 이용, 주민들을 선동하며 총공세를 감행했다.


    그러나 각지에 분산·고립된 채 총체적 부패와 전의 상실에 빠져 있던 월남군에게는 이미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의지가 없었다. 월남군은 곳곳에서 패퇴하며 밀리기 시작했다. 월맹군에게 허를 찔린 티우 대

    • .. 98.***.179.113

      궁금한 점이 있는데요..
      왜 현 정부에 반대하면 친북/빨갱이 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현재 정부를 많이 싫어하는데, 현 북한은 더더욱 싫어하거든요..

    • 1234 187.***.66.58

      적의 적은 (전략적) 동지이기때문입니다 북한 입장에서는 반 정부 세력은 일단 이용합니다 이상황에서는 북한은 철저히 자신을 숨깁니다 그런후 목적을 이루면 제일로 제거 대상이 됩니다 그후 제이번 제거 대상은 남한내에서도왔던 친북조직입니다 (친북세력에게 이러리라고는 다들 모릅니다)

      • md 192.***.75.30

        껍데기만 보고 알맹이를 제대로 못보는…

        • Sad 187.***.56.111

          알맹이를 안다고 까부는 이런 존재들이 공산주의의 숙청 우산순위이죠 죽을때끼지도 모르고 조용히 사라지므로 알려지지 않습니다

    • ….. 98.***.180.231

      쓰레기통이 넘쳐나는구나….

    • AAA 66.***.23.118

      북진통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첫째, 탈북자들이 북한 밖에서 운영하는 라디오 방송을 대폭 증가시켜야 한다.
      진실은 김정일의 최대 적(敵)이다. 반체제 운동은 독재자들의 선전을 약화시키는 사실에 기반을 둔 정보 위에서 번성한다.

      둘째, 북한 정권을 생존시키는 데 사용되는 모든 외국 지원과 자금 흐름을 차단해야 한다.

      셋째, 무역과 해상수송로를 차단해야 한다. 중국은 유엔의 대북 경제재재에 협조하지 않을 것임을 밝혀왔지만 북한으로 오가는 선박은 막을 수 있다.

      넷째, 경제전쟁을 선포하라. 북한 정부는 제3제국(1933-1945년 히틀러가 통치한독일) 이후 미 달러화를 위조한 첫 정권이다. 우리는 북한 화폐 폐기로 갚아줘야 한다. 경제사정이 악화되면 북한 엘리트가 가장 불리하게 될 것이다.

      다섯째, 미 연합국들은 북한 군부에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 김정일 일가와 떨어지도록 해야 한다. 1968년 나포돼 북한에 억류돼 있는 미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는 침몰돼야 한다. 우리는 미국의 자산에 대해 그럴 권리가 있다. 북한의 모든 장교는 정권의 수명이 다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섯째, 군사적 균형을 변화시켜라. 우리는 필요시 북한에 신속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한.미.일 3국의 힘을 증강하는 방안을 한국.일본과 협의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북한의 고조되는 핵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5-150 킬로톤 규모의 미국 전술핵무기 배치문제를 공개적으로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으로 하여금 북한 지원이 중국 안보 자체를 위험하게 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고 지원 의지를 약하게 할 것이다. 북한 장성들도 김정일을 추종하는 게 더 나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북한의 현(現)정권을 평화적으로 무너뜨리기는 쉽지 않지만 결코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북한 주민들 스스로 해방을 촉진시키는 것이 한반도의 안보를 비폭력적으로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 조지햄버거 98.***.235.217

      한가지 다행스런 일은
      이런 단세포들은 높은자리에는 없다는 것이죠..

    • 지나 75.***.175.95

      원글에 올라온 글이 꼭 현재의 대한민국 상황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큰 교훈으로 이용 될 수 있을 것 같군요.
      꼭 공산주의를 떠나서도 안보에 대한 어려움과 중요성을 느끼지 못할 때 예외없이 그 국가는 망했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로마와 몽골제국인데….그렇게 무섭고 강하고 거칠것이 없었던 엄청난 제국이 더 큰 군사력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닌 스스로 무장해제 하면서 지리멸렬했다는 역사를 보면 대한민국이 이제좀 먹고 살만하고 경제적으로 리더격을 맡는 이시점에서 중요한 교훈이 되리라 봅니다.

      원글의 월맹 및 월남의 경우를 봐도 그렇고 장개석의 군대가 오합지졸이 되어 현재의 대만 섬으로 쫓겨난 것을 봐도 정신무장 안보의식이 얼마나 중요한가요?

      장개석의 군대가 참 불쌍한 것이 거의 거지수준의 공산군대에 중국본토를 내주고 또 625 한국전에서는 그 군대가 대부분 총알받이로 참전해서 일종의 처벌의 효과도 보는 일석이조 전략에 수십만명이 피를 흘렸습니다.

      안보의식이 이렇게 중요한데도 참 많은 분들이 쉽게 그러한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아요.

      김길태같은 악마같은 살인마를 지지하는 까페를 만들고 그의 처벌보다는 연민의 정으로 그를 돕고 (사회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이론으로) 처벌의 수위를 낮추어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김길태라고 하지는 않지만 김길태 같은 놈이라고 하듯이 북한주민 수백명을 굶겨죽이고 사상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수십만명을 노동캠프에서 서서히 죽이는 그런 정권 또 수시로 테러 등으로 민간인과 군인들을 수백 수천을 죽이는 그런 정권을 지지하고 또 그들을 위의 김길태 지지와 같이 다른 사회적 정치적 원인으로 돌리면서 물타기 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빨갱이 같은 (김길태 같은)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 아닐까요?

      빨갱이라 불리는 것을, 현정권에 반대하면 무조건 적용시킨다는 것보다는, 북한의 그 정권을 비판하기 보다는 두둔할때에 일종의 “김길태를 지원하는 황당한 사람들”이라는 광범위한 의미에서 빨갱이라 불리는 일종의 “대명사”라는 생각이 들어요.

      연평도 사격연습에 북한이 미련하게 건드려서 가뜩이나 독이 올라있는 군대를 건드려 너무 많은 사상자가 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북한군도 빽없는 가난한 인민의 자녀들이나 연평도 근해와 같이 위험하고 험한곳으로 전출 되어 온다는 탈북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결국 불쌍하고 죽거나 다치는 북한군들은 힘없는 백성들이네요……

      그래도 우리의 안보를 위해 어쩔 수 없는 대응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될 것 같아 마음이 조려지네요.

    • 궁금 24.***.209.194

      원글은 북한으로 부터의 위협을 방지하고 국가 안보를 확보하자는 차원에서 올렸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국가 안보를 강화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 국방을 강화하기 위하여 국방비를 늘리거나 군장비를 현대화하기
      둘째 국민적 국방의 의무 정신을 고취하기 위하여 사회 지도자급 인사 및 자녀에 대한 국방의 의무 수행에 대한 면밀한 검증
      셋째 북한의 기습 공격에 대한 부실한 대응에 대한 철저한 책임자 처벌 및 방지책 마련
      다섯째 한국내 빨갱이 소탕

      그냥 단순하게 생각을 해보면 위 정도인데 왜 이런 글에 항상 다섯째만 강조되는 이유가 뭘까요?
      그건 애초부터 원글이 국가 안보를 위한 글이 아니라 정부 반대 세력들을 빨갱이로 몰아 세우기 위한 글이기 때문이죠. 그들은 조금이라도 한국의 안보를 걱정했다면 조금은 국방비라든가 사회 지도층 인사의 부당한 군미필 문제에 대해서도 분노를 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 딴나라알바 74.***.125.225

      아직도 월남이 패망했다고 말하는 무식한놈이 있네..
      베트남이 통일 된거야 ㅂ.ㅅ.아
      쓰레기글을 길게도 늘어놔서 보지도 않았다..

    • observer 75.***.244.109

      베트남 패망을 안보의식 문제로 보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고 보입니다. 당시 경제력이 너무나 형편이 없었던 베트남 국민들에 민주주의같은 이념의 사치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원한 것이아니라 평등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먹고 살기를 원했었고 그것을 더 확실하게 제시한 쪽이 부패한 남쪽의 티우정권보다는 청렴한 북의 호치민의 정신을 더 좋아한 것이 공산화의 주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공산주의가 세계속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통치구조이고 베트남도 공산화로 인해 가난한 나라가 되고 말았지만, 공산화의 원인이 국민들 속에 들어가지 못한 정권의 문제라고 봅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좌파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어느 누가 공산주의를 원하겠습니까. 지금 우리의 안보를 위협하는 것은 천안함 사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아니고 또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위험한 것은 그러한 비판에 대해 수용하고 거기에 대한 뚜렷한 명분이나 분명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무조건 덮어두거나 국민의 뜻에 반한 방향으로 나라가 흘러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이 군사적으로 세계적으로 최강의 나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온갖 종류의 말도 않되는 주장을 하는 사람부터 극 보수의 다양한 사람들이 조화를 이루며 운영되는 나라라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