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세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살아온 삶 – 마지막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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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 45.***.136.55 3403

    인터넷으로 찾은 그녀의 집 주소는 위스콘신주 밀워키 외곽의 작은 도시 도로변 주택가 였습니다. 제가 살던 기숙사에서 밀워키까지는 논스톱으로 6시간 30분 정도 걸렸습니다. 하지만 너무 많이 긴장한 탓에 기분상으로는 한 두세시간만에 도착했던것 같습니다. 긴장이 점점 더 심해지고 나중엔 정말 겁까지 나더군요. 내가 지금 이게 뭐하는건가하는…후회 비슷한 생각도 들고 그래서 중간에 차를 돌려 다시 돌아갈까 여러번 망설이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끝을 내야만 하는 문제였고 다시 모든걸 되돌리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상황이었기에 망설임을 억누르고 결국 저는 그녀가 사는 동네에 도착했고 주소상에 나오는 그녀의 집이 실제로 저 멀리 보이는 어떤 작은 개스 스테이션에 차를 주차시켰습니다. 한동안 차안에 앉아 동네를 둘러보며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습니다. 당시는 제가 셀폰이 없었기때문에 (이미 그당시에 셀폰을 팔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납니다. 하여간 전 셀폰이 없었습니다.) 전 개스 스테이션 한쪽 구석에 있던 공중전화 박스를 이용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25센트 동전 몇개를 전화기통에 집어넣고 번호를 누르는데 정말 손가락이 덜덜 떨리더군요. 너무 긴장한 탓에 프린트해온 종이의 그 짧은 10자리 전화번호가 한번에 외워지질 않아서 한 번호 누르고 다시 종이를 쳐다보고 또 누르고 그렇게 여러번 나누어서 번호를 눌렀습니다. 결국 수화기 넘어에서 다이얼 신호음이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참 길게도 안받더군요. 그래서 아..집에 없나보다 잘됬다 오늘은 그냥 전화 끊고 다음에 다시 와야겠다라고 도망치려는 순간 신호음이 뚝 끊기면서 상대방의 전화기 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는듯한 그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젠 진짜 말그대로 빼도 박도 못하는 그런 상황이 된겁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녀: 헬로우?

    나: …………헬로우?

    그녀: 예스?

    나: …..어..…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할지 말문이 막히고 제가 큰소리로 말을못하고 있으니까 그녀가 다시 묻습니다.

    그녀: 헬로우?

    나: 하이, <그녀이름>…나야 <내이름>

    그녀도 저도 순간적으로 얼어붙어 버립니다. 영어 표현 그대로 Speechless 그 자체였던거죠.

    잠시후 그녀가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합니다.

    그녀: 하이…잘지냈어?

    나: 잘지냈지. 너도 잘지냈어?

    그녀: 응…

    그리고 잠시 서로 또 할말을 못찾습니다.

    제가 억지로 용기를 내서 정말 부자연스러운 액센트와 톤으로 묻습니다. 이건 제가 그녀집을 찾아가면서 차안에서 생각했던 시작 멘트였습니다.

    나: What are you doing?

    마치 예전에 그녀와 제가 한국에서 살았을때 항상 서로에게 전화를 걸면 제일 먼저 묻던 말이었죠. 전 그녀가 우리가 예전에 했던 말들을 기억해주길 바랐던것 같습니다.

    잠깐 정적이 흐르더니 그녀가 약간 더듬거리며 말을 합니다.

    그녀: I am…..uh….. feeding my baby.

    예전에 어떤 티비 광고에서 물이 가득찬 투명한 유리컵에 빨간 잉크를 한방울 떨어트렸는 그게 첨에는 단순히 빨간 작은 점처럼 모여있다가 잠시후 순식간에 360도 전방향으로 빨갛게 퍼지면서 번져나가는 그런 모습 본적 있으시죠?

    무슨 baby란 단어가 들린거 같은데…이 상황에서 갑자기 왜 my baby란 말을 하지? 전 순간적으로 그녀의 말이 해석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말들이 하나둘씩 마치 퍼즐의 조각이 맞추어져 가듯이 빠르게 그 의미가 제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나: You….you…are…..WHAT?

    그녀: I am sorry..I am sorry…I’m….

    그러면서 갑자기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하더니 작은 소리로 흐느끼기 시작합니다. 전 지금까지도 그때 그녀가 왜 울었는지 정확히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유체이탈 화법이란 농담들을 가끔합니다. 너무 갑자기 감당못할 어떤 상황에 처하면 자신이 처한 현실임에도 그게 마치 다른 사람의 모습을 영화나 테레비를 통해 보는것처럼 느껴지는걸 전 그때 실제로 경험해봤습니다. 뇌가 작동을 중단하고 머리속이 하얗게 변하는 그 황당한 순간에 전 전화기에 동전을 더 넣어야 될까 말까 혹시 내가 여기서 눈물을 흘리거나 하면 개스 스테이션의 주인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을까… 다시 기숙사로 돌아가면 저녁 늦게나 들어가겠구나. 집에 가는길에 집 근처 24시간 월마트 들러서 99센트짜리 탐피코 오렌지 쥬스 사가야겠다…아 식빵이랑 계란도 사야되는구나…갑자기 이런 장봐야 할 것들이 생각나기 시작했습니다.

    잠시후 서서희 제정신이 돌아오면서 그녀가 했던 말들이 어떤 의미인지 상황이 파악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잠시후 그녀가 저에게 묻습니다.

    그녀: 왜 내편지에 답장 안했어?

    나: ………..

    그녀: 누구 만나니? 결혼했어?

    나: 아니

    그녀: 그럼 왜 나한테 답장 안한거야?

    나: ………….

    그녀: 난 아주 오랫동안 네 답장을 기다렸어.

    나: …………. 미안해

    그녀는 제 답장을 끝까지 기다렸답니다. 결국은 침묵하는 저의 반응이 저의 답이라 생각했던 거구요. 그리고 저를 떠나기로 결심했다는 거죠. 그렇게 우린 서로 돌아올수 없는 다리를 건넌겁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기 시작한 저는 그 황당한 상황에서 마치 시집보낸 딸자식을 걱정하는 친정아버지 같은 기분이들기 시작했습니다. 시카고 에서 가난하던 부모 밑에서 함께 살던 그녀가 지금은 금전적으로 고생안하고 잘살고 있는걸까…어린 젓먹이 아이 키우면서 일을 나가는건 아닐까 하는 …. “지금 네가 남 걱정 할때냐?” 같은 정말 황당한 그녀에 대한 걱정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울음도 그치고 마음을 약간 진정 시킨후 저에게 묻습니다.
    마치 그녀와 제가 한국에서 함께 있을때 저에게 언제나 전화상으로 지금 어디있냐고 어린아이처럼 애교섞인 목소리로 묻던 그런 말투와 느낌 그대로더군요.

    그녀: Where are you?

    전 그 순간에 이미 결혼하여 다른 남자의 아내가되고 아기의 엄마가 된 그녀의 삶을 보호해주기 위해 제가 해줄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한건지….그냥 본능적으로 그런 걱정과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 I….uh….I am ….in Korea.
    그녀: Are you still drinking alot everyday? Please don’t drink too much alone…

    아..너 진짜 너무 하다.. 혼자 술많이 마시지 말라는 그녀의 말을 듣고 전 곧바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면 제가 얼마나 괴로워할지 그녀는 알고 있었을텐데로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된 그녀가 저에게 할 수 있는 전부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우리가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었어도 제가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괴로워 할것이라는 사실을 너무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정말 그녀는 저의 성격에 대해 너무 자세히 너무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녀때문에 괴로워하고 혼자 술마시고 다닐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녀가 저에게 “Please don’t drink too much alone” 이란 말을 하면서 “alone” 이란 단어를 천천히 강하게 힘주어 말하더군요. 마치 어떤 암호처럼 혹은 괴로워하는 자식을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처럼 그 한 단어에 그녀와 저만 알수 있는 수많은 이야기와 감정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린 그런 서로를 보호해주기 위해 그순간 더 이상 서로에게 다가가서는 안된다는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 그렇게 그녀와 몇마디를 더 나누고 그녀에게 아마 이게 우리의 마지막일거란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뒤에 무슨 말들을 더 했는지는 사실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녀를 만나러 6시간 30분을 운전하면서 보았던 하이웨이 진입 표지, 빌딩들, 간판들… 그리고 그녀가 사는 동네에 도착했을때 그녀 이웃집에서 한손엔 커피 머그를 들고 대문을 열고 나와 바닥에 떨어진 신문을 줍던 어떤 미국 아줌마의 핑크색 잠옷을 보면서 한국집의 부모님을 떠올렸던것까지도 선명히 기억을 합니다. 그날 날씨는 참 맑았죠. 제가 차를 주차했었던 개스 스테이션의 흰색 칠이 벗겨진 건물 나무 사이딩도 기억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그날 어떻게 기숙사로 돌아왔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우린 살아가면서 용서라는 상황에 자주 처하게됩니다.
    우리가 용서를 해주기도 하지만 또 누군가로부터 용서를 받기도 합니다.

    그녀가 저에게 보냈던 그 3통의 편지를 받고 전 그녀의 과거를 용서하는 문제에만 집착했습니다. 전 그녀가 저에게 과거에 했던 말들에 대해 먼저 사과를 해야하고 그래서 제가 그녀의 과거를 용서해야만 제 자존심이 회복되고 우리가 다시 만날수 있다라고 생각했던거죠. 하지만 그녀가 저에게 보냈던 3통의 편지는 우리의 과거에 대한 용서가 아니라 그녀와 저, 앞으로 다가올 우리의 미래를 용서하겠다는 그녀의 양보였고 배려였던겁니다. 전 그걸 깨닫지 못한거죠 . 그래서 과거에 집착했고 과거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편지에 침묵으로 일관했고 그로인해 그와같은 참담한 결과가 나타난것이었습니다.

    제가 살던 한국의 그 동네앞 커피숖에서 그녀를 처음 만난후 24년이 흘렀습니다. 많은 세월이 흘렀고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녀와 저만 느낄수 있는 서로의 존재에 대한 인식 우린 그런걸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지금 제가 어느주에서 무슨일을 하면서 사는지 알고 있고 제가 그녀를 위해서 일부러 그녀로 부터 거리를 두고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살아가고 있음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우리가 여전히 서로를 기억하려는 노력임을 그녀도 잘알고 있습니다.

    • : 75.***.206.113

      그녀: ….흑흑흑..,,
      남자: …애가…애가…누구 애기야?
      여자: …흑흑흑…니 애기야.
      남자: ???!!!!

    • : 75.***.206.113

      남자: 그럴리 없어!!

    • : 75.***.206.113

      여자: …흑흑흑…아니, 진짜 니 애기야!

    • : 75.***.206.113

      남자: 아니야! 그럴리 없어! 우린 한번도 베드씬을 같이 해본적이 없쟎아!

    • : 75.***.206.113

      여자: …흑흑흑…알아. 그런데 진짜 니 애기야. 믿어줘. 그리고 미안해….흑흑흑

    • : 75.***.206.113

      여자: 그날밤 기억해? 내가 같이 자자고 졸랐던 날?

      그녀의 이야기는 이랬다.

    • -_- 108.***.194.156

      예전 첨밀밀 영화가 문득 떠오르네요 줄거리도 가물 거리지만 먼 거리서 헤어짐이란 주제가… 아름다운 추억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H 23.***.202.103

      결말이 어째 낚인거같음

    • 궁금 108.***.130.189

      마무리 감사합니다. 바쁘신지 서둘러 끝 낸 느낌이 좀 있지만 잘 읽었습니다!

    • 쉬어가세 73.***.88.9

      진심으로 쓰신 실화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분과의 결말이 안타깝지만 너무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건승하세요!!!

    • 음하하하 68.***.84.232

      뭐지.. 이결말은.. 너무 허무맹랑하군

    • 지나가다 76.***.195.119

      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살아온 삶이라며 연애 잠깐한 얘기로 끝내네 그려…
      서초동에 우열반이라 친구라 반가워했드만 그것도 뻥이쥐??

    • 헐1234 15.***.201.90

      중요한 게 빠진 이 허탈함…

    • 엔지녀 169.***.120.175

      절대 엔딩이 허무맹랑하지않고
      실제로 글쓴분에 슬픔과 아련함이 저한테도 전해지네요.
      긴 정성스러운 글들 오랫동안 여러사람들과 나누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글쓴분은 아주 멋진분입니다 ^_^

    • 악플싫어 122.***.45.157

      결말보고나니 힘이풀리네요 으어어어어억

    • 아쉬움 70.***.72.148

      아~ 님의 글의 끝났다니 아쉽기만 합니다. 가끔 오셔서 현재의 삶도 이야기로 풀어 주시면 어떨까 하는 바램입니다. 그동안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아.. 47.***.178.103

      글 잘읽었습니다.

      저는 한~참 후배라 시대적으로 공감안되는 부분이있지만 국제편지까지 주고받으면서도 그런 연애를하셨다니 평생 못잊고 사시겠네요..

      정말 안타깝네요 전 개인적으로 여운 많이남았어요..

      그 백인여자분하고는 이제 아예 연락도안하게 되신건가요?

      참 인연이라는게 ㅠㅠ 아쉽네요

    • 악플싫어 122.***.45.157

      사실 붙잡으려면 얼마든지붙잡는건데 그여자가 남편이있는것도아니고 왜안잡으시나 궁금.. 아이때문인가요?

    • Ar 108.***.30.35

      생각보다 너무 일찍 마무리를 하시네요. 아쉽습니다. 처음으로 남이 써 놓은 연재글 끝까지 읽어봤습니다. 감사합니다.

    • 다음 76.***.134.113

      인생이 잠깐인거 같아요..수무한 세월을 보낸것에 공감이 갑니다.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