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해봅시다 ### 광주폭동 vs 광주민주화운동

  • #406796
    만주정벌 12.***.132.25 6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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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토론에 참여해주셨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조금전에 글을 쓰다가 실수로 원글을 지워버렸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소중한 글마저 모두 날려버렸습니다. 큰 실수 한거죠. 운영자님께서 매일 저녁 서버 백업을 해놓으시면 다시 살릴수도 있을텐데 그렇게까지는 안하실거 같고 그래서 다시 한번 토론 시작글을 띄웁니다. 그리고 필명도 바꾸었습니다. 저밑에 어떤분께서 계속 북진통일이란 필명을 도용하셔서 그냥 그분께 드리고 전 다른것으로 바꾸었습니다. 앞으로는 제 필명을 도용하시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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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5월 전남 광주에서 발생한 민군경 무력충돌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3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당시 현장에 있던 당사자들이 대부분 생존해 있고 그들은 서로 다른 입장의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적 정치상황 지역적성향 이념적 대립을 모두 내려놓고 한국을 떠나 타국에서 생활하는 재외국민의 중립적 시각으로 이 사건을 공정한 법의 잣대로 판단하고 이야기해 봅시다. 우리는 이사건을 광주폭동이라 불러야 할까요 아니면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 불러야 할까요?

    • 간접경험 96.***.252.49

      만주정벌이라 북진통일과 일맥상통 하네요…
      원글을 수정하지 마세요…
      잘못하면 또 지워집니다.

      • 오마이 24.***.147.135

        궁금해서 그러는데, 어떻게 글을 백업 하셨나요? 습관적으로 글을 백업해두시는건가요?

        • 간접경험 96.***.252.49

          인터넷에 있는 웹페이지는 일단 본인의 컴퓨터의 메모리에 저장 됩니다.
          인테넷이 연결(온라인) 되지 않아도 자신이 한번 읽어 본 글은 오프라인으로 언제 든지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방문 했던 사이트를 부모들이 다 알 수 있는 거죠…
          인터넷 익스플러러에서 히스토리를 보면 날짜별로 방문했던 사이트들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 간접경험 96.***.252.49

      마침 저한테 백업이 있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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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S 2010-09-06 21:32 209.♡.110.58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는군요.

      역사를 이야기 할때는 일어났던 일의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해서 서술만 가능합니다.
      어떠한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는것은 개인의 몫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주장 또한 철저하게 ‘사실’만을 기반으로 뒷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공정한 “법적인” 잣대’로 판단을 해 보시려면,
      당시 현행법/헌법을 기준으로 누가 어떠한 법을 위반했는지 차근 차근 짚어나가면 될듯합니다.

      북진님의 리서치 결과와 생각을 기다려 보겠습니다.

      제 ‘생각’은 먼저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근무지를 이탈하여 계엄령을 선포한 전두환 전 장군및 쿠테타 주도 세력의 ‘위법’이 제일 먼저 머리에 떠 오릅니다. 간접경험님 말씀대로 이일의 시발이 거기서 시작이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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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ㅎㅎㅎ 2010-09-10 02:02 174.♡.224.222
      제 ‘생각’은 먼저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근무지를 이탈하여 계엄령을 선포한 전두환 전 장군및 쿠테타 주도 세력의 ‘위법’이 제일 먼저 머리에 떠 오릅니다. 간접경험님 말씀대로 이일의 시발이 거기서 시작이 되니까요.
      —- >
      이렇게 따지면,,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광주사태(혹은 민주화운동)의 시발은 서로 정권을 가지려고 설치다가 국민들에게 혼란만 가져다 주고 결국에는 군부에게 쿠테타의 빌미를 제공한 삼김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중 민주화 세력이라고 자청하던 삼김중의 한명은 쿠테타 세력과 손을 잡아서 대통령이 되었고, 이중 한명은 자신이 정적의 오른팔이 다른 김과 손을 잡아서 대통령이 되었죠. 개인적 제생각은 광주 사태의 시발은 국민은 뒷전이고 자신의 야욕때문에 좋은 기회를 놓친 이 삼김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면, 결국 삼김이 문제가 아닙니까? 국민들은 그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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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 2010-09-07 01:45 24.♡.147.135
      법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12.12는 군형법상 엄연한 군사반란에 해당됩니다. 하나회 중심으로한 전두환 군부세력이 대통령을 자리에서 강제로 자리에서 내리고 쿠데타를 일으킨 사건아닙니까.

      5.18은 제가 보기엔, 헌법에 명시된 저항권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0.26이후 긴급조치 9가 최규하대통령에 의해 해제된후, 나라는 기존의 헌법, 유신헌법으로 회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뭐 유신헌법도 바뀌어야 마땅하고 여러가지 박정희가 자기 독재체재를 다지기 위해 여러 악의적 법조항이 첨가됐지만, 그외에 국민의 기본권에는 유신 전의 헌법과 틀을 같이 했습니다. 저항권도 유신헌법에 명시돼있었습니다. 10.26 당시 김재규를 변론하던 변호사도, 김재규는 유신정권을 만든 박정희를 살해한 것은 헌법에 명시된 저항권에 해당한다며, 변호를 맡은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헌법에 명시된 저항권은 무엇이냐….

      http://mybox.happycampus.com/nice7102/564677

      “민주적 법치국가적 기본질서 또는 기본권보장체계를 위협하거나 침해하는 공권력에 대하여 더 이상의 합헌적인 대응수단이 없는 경우에 주권자로서 국민이 민주적, 법치국가적 기본질서를 유지 회복하고 기본권을 수호허기 위하여 공권력에 저항할 수 있는 최후의 비상수단적 권리를 말한다.”

      주체는 국민이고, 객체는 5.18당시 전두환 군사반란 군부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5.18은 유신처제의 긴급조치권이 해제된 상태에서, 헌법을 무시하고, 군사반란을 일으켜 국민의 기본권을 빼앗은 전두환 군부세력에 대한 국민의 저항였습니다. 그러므로, 5.18을 ‘폭동’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북진님???

      윗분이 말씀 했듯이, 법적인 측면에서, 5.18 민주항쟁을 바라보는 것은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네요. 물론 법적측면에서도, 저항권 행사의 정당성은 전두환 군부세력의 군사반란보다 오히려 더 높다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12.12를 군사반란, 5.18을 민주항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보편적으로 타당하다고 보며, 법적으로도 타당하기 때문에 그렇게 규정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5.18 민주항쟁을 법적 잣대를 대서 비난하기전에, 전두환 군사반란을 먼저 법적 평가하는게, chronically, legally 공정하다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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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j 2010-09-07 16:27 129.♡.205.165
      “법적으로” 1997년 대법원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피고인(전두환 등)의 국헌문란행위에 항의하는 광주시민들은 주권자인 국민이 헌법수호를 위하여 결집을 이룬 것 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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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굼 2010-09-07 19:54 67.♡.21.216
      이 논쟁에 대해서 북진통일님이 어떤식으로 의견을 펼칠지 정말 흥미 진진 ^^

      북진통일님 빨리 님의 의견을 말씀해 주세요.

      광팬으로 부터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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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 2010-09-07 22:08 24.♡.147.135
      뭐 북진님한테 5.18, 그냥 뭐 대충, 빨갱이들 폭동 사건이겠져. 대법원에서 판결내용도 위에 누가 올리셨는데, 저거 알았더라면, 북진님 ‘법적인 잣대’란 말 절대로 안 썼을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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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cer 2010-09-08 16:52 198.♡.38.59
      오마이님과 sj님 댓글에서 게임 끝… 이 느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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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전문가 2010-09-09 01:34 75.♡.154.167
      그당시 아주 간략하게 텔레비젼에서 데모관련 뉴스들이 나왔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그냥 통상적인 그런 수준의 뉴스들….

      그런데 전라도 쪽에서 뭔가 더 큰 데모가 일어났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던 시점이었던 것이 희미하게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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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9-09 11:09 76.♡.226.217
      애초부터 조직적인 행위가 아니었기때문에, 특별히 규정짓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같은 행동을 한다고, 그 의도도 모두 같다고 할 수는 없죠.

      불순한 의도를 갖고 한 사람들에겐 폭동이고, 선한 의도를 가지고 한 사람들에게는 민주화운동인것이죠.
      일반적으로는 그 주도자들의 의도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데, 누가 주도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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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S 2010-09-09 12:40 70.♡.254.65
      점심먹고 졸음이 몰려와서 참새가 방아간 드나들듯 와 봤습니다. 댓글이 늘었길래 무슨 이야기가 있나 궁금해서 읽던중 제가 호명된것을 발견하고… 출석에 답을~

      저의 80년의 봄은 86에 시작됩니다. 형이 있던 동기녀석이 ‘데모가’ 프린프물을 들고와서는 광주에서 “이런 저런 일이 있었다고” 들은 이야기를 해 주었지요. 그러고는, 동네 성당에서 있었던 ‘사진전’에 가보고 상당한 충격을 받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박정희씨가 저격 당했을 당시는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잠들기 전에 통곡을 한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토록 손가락질 하고 욕하는 북한의 모습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이는 모습입니다.

      아마 80년 봄에는 여자사람 상의 속옷을 가지고 북한을 조롱하던 반공 교육을 운동장에 앉아서 듣고 있지 않았을까요? 북한에서 귀순한 사람에게 ‘브라자’를 보여 주었더니 그것이 한 쪽에는 밥을 담고, 다른 한쪽에는 국을 담는 식판? 이냐고 묻는다는 이야기를 우스개로 하면서 강의(라고 쓰고 세뇌라고 이해해야하는)를 하시던 아저씨…

      당시 저는 초딩이었습니다. (온라인에서는 너무 많은 신상을 까면 안된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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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진통일 2010-09-09 14:03 12.♡.132.25
      한가지 밝혀두고자 합니다. 제 글 다음에 쓰신 9번글은 제글이 아닙니다. 그분께서 어떤 이유로 제 필명과 같은 북진통일을 사용하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제가 쓴글도 아니고 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글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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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뭐야? 2010-09-09 15:01 98.♡.227.197
      이런 코멘트는 당연히 9번글에 가서 다셔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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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S 2010-09-09 21:42 209.♡.110.58
      감사합니다.
      제가 이 글과 9번글에 댓글을 달았고, 9번글은 북진님 글이 아니라서 여기 글줄기에다가 저에게 일부러 위의 사실을 알려주시려고 댓글을 다신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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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진통일 2010-09-09 15:06 12.♡.132.25
      원글에서 제가 사용한 “법적인” 이란 단어 앞에는 “공정한” 이란 단어도 붙어있습니다. 1997년 대한민국 사법부에서 판시한 판결문으로 법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그것이 과연 공정한가 입니다. 저는 지금 전두환씨의 편을 들고 신군부 등장의 역사적 당위성을 주장하자는게 결코 아닙니다. 어떤분의 주장처럼 사법부의 판결문으로 법적인 문제가 해결된다면 국보법을 무시하고 방북했던 임수경씨는 지금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어야 하고 영원히 대한민국의 역사책에 반역자로 기록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국보법이 여전히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수경씨는 통일의 꽃이라고 까지 불리며 민주투사로 인정받는 이유는 국보법이라고 하는 법자체의 당위성과 공정성이 국민들로 부터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용한 “법적인” 이란 의미는 법외의 어떤 다른 이유로 인해 그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그런 의미의 법이 아니라 전국민이 옳다고 믿어도 오로지 법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의미의 법입니다. 그리고 그게 공정한 법이구요. 1997년이면 아마도 김영삼씨 혹은 김대중씨가 한참 메이져 정치인으로 활약할때일겁니다. 전두환정권으로 온갖 탄압과 심지어 사형언도까지 받았던 정치인들이 정권을 잡았을때 나올 수 있는 정적에 대한 재판의 결과는 그 공정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곳 게시판에서 토론해보고자 하는 내용은 좌.우,보수,진보따위의 이론적 갑론을박이 아닙니다. 또한 전두환과 신군부의 누명을 벗겨주자라는 제안도 아닙니다. 광주 민군경 무력 충돌사건을 말 그대로 일종의 “살인사건”으로 보고 그 사건의 시작부터 종결까지의 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개입되고 그 일들의 원인은 무엇인지를 공정히 따져보자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광주사건을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배심원의 입장에서 공정한 법적인 시각으로 한번 바라보자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12월 12일 밤 제3한강교를 건너 하극상의 백미인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가 광주사건의 원인이고 결과라면 그 과정에서 언제나 피해자로 등장하는 김대중 김영삼씨의 역할을 무었이었을까요? 혹시 광주사건은 전두환 김영삼 김대중 세사람이 1980년도에 벌였던 정권쟁탈전 과정에서 우연히 발행한 “사고”는 아니었을까요? 그런 이야기를 해보자라는 것입니다. 광주사건의 객관적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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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 2010-09-09 15:09 24.♡.147.135
      북진통일님, 언어가 상당히 순화되셨네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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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 2010-09-09 15:36 24.♡.147.135
      사실 좀 욕도 정답게 오가고, 횡성수설도 오가야 재밋는데, 뭐 나이스하게 나오시면, 저도 어쩔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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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cer 2010-09-09 15:25 198.♡.38.59
      광주항쟁에 대한 나름대로의 객관적 시각을 오마이님이 적어주셨으니 이제 북진통일님이 가지고 계신 객관적 시각(정권 쟁탈전 과정에서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라는 시각)을 좀 더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어떤 우연이 발생했다는 것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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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진통일 2010-09-09 15:41 12.♡.132.25
      오마이님께는 1차 경고를 드리겠습니다. 이곳은 토론의 공간이지 말장난과 상대방 글을 읽고 말꼬리 잡기식의 상대적 논리를 펴는 곳이 아닙니다. 오마이님식의 말꼬리 잡기 논리로는 정상적인 토론이 불가능해지고 결과적으로 다른분께서도 말꼬리 잡힐까봐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못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런 이유로 오마이님께 1차 경고를 드리는겁니다. 오마이님께서는 토론의 주제에 대한 깊은 이해와 논리를 가지신분 같은데 그러시다면 좀더 설득력 있는 글로 토론에 참여주시기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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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 2010-09-09 16:08 24.♡.147.135
      몇차까지 경고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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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 2010-09-09 16:13 24.♡.147.135
      경고를 했으면, 뭐 경고가 끝나는 시점이 있어야지 겁을 먹는데, 이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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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깡주 2010-09-09 17:37 216.♡.71.163
      1980년 5월 29일자 “Newsweek”(Asia 판) 을 읽어보세요.

      그동안 궁금하고 진실된 소문을(?) 알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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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S 2010-09-09 21:37 209.♡.110.58
      북진통일님께,

      님께서 생각하시는 바를 밝혀 주시고, 그 주장을 뒷받침 하는 사실들로 설득을 하셔야 하는 차례입니다. 님의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결론을 내리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본인의 주장을 대신해서 말해달라고 보채시는것 같이 보입니다.

      처음 원글과 다시 길게 댓글로 부연설명하신 두 글의 내용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본인이 하고싶은 말만 (그것도 별다른 설명이나 뒷받침해줄 근거나 자료도 없이) 하고 계십니다.

      군사 반란이 일어났고,
      광주 시민들이 헌법에 보장된 권리에 따라서 주권을 지키려 하였고
      반란을 일으킨 군부가 군대를 동원하여 국민의 주권 행사를 무력으로 막았습니다.

      이게 제가 생각하는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객관적인 시각) 이라는 표현은 아무리 생각해도 모순이 있는 표현같아서 바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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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진통일 2010-09-09 22:12 24.♡.236.238
      BS님,

      이곳은 제 개인적인 정견 발표장도 아니고 그래서도 안됩니다. 전 오히려 여러분들의 의견이 어떠하신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저의 원글을 다시 한번 주의깊에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BS 님께서 본인의 의견을 피력하시는데 제가 반드시 필요한가요? 처음에도 말씀드렸듯이 원글에서 나타난 주제에 대해 본인의 의견만 피력하시면 됩니다. 상대방이 어떤 의견을 이야기해야만 그다음에 나의 의견으로 반박하는식의 정치 토론이 아닙니다. 간접경험님의 글을 잘 읽어보십시오. 본인의 생각과 경험만을 이야기하고 계시잖아요. 주제의 정당성과 가치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토론의 형식과 절차도 모두가 인정할수 있는 결론을 도출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BS님의 의견을 피력하시는데 제가 무슨말을 하는것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토론의 주제가 뭔지 정확히 이해가 안되시는거라면 원글을 한번 다시 읽어보시면 될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재미있는 의견들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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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S 2010-09-09 22:24 209.♡.110.58
      이야기해 봅시다 그러시고 여러분의 생각은? 하고 물어 보셨길래…
      북진님 생각도 이야기 해주실줄 알았거든요.
      누가 무슨 이야기 하고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이 거기에 반박하고 그런것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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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답 2010-09-09 23:36 67.♡.21.216
      북진님께서 듣고싶은 말은 아마도 다음과 같지 않을까 나름 상상해 봅니다.

      광주사태(민주화 운동)은 북한의 사주를 받은 남한내 고정간첩과 빨갱이들이 선량한 시민들을 선동하여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한 사건이다.

      또 국가권력에 맞서 “불법”으로 파출소등을 습격하여 “무기”를 습득한 뒤, 국가전복을 꾀하려 신성한 국토방위의 의무를 수행하는 국군을 향하여 총질을 하였고, 이에 국군은 자위권 차원에서 어쩔수 없이 대응사격하고 무장폭도들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성공한 작전이다.

      이 모든 사건은 그 뒤에서 배후 조정한 김대중과 그 일당의 책임이고 이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부화뇌동한 깽깽이 들의 잘못이다.

      북진통일님, 이게 님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 그리고 듣고 싶은 말씀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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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답 2010-09-09 23:53 67.♡.21.216
      아 그리고 북진통일 님께서 말씀하신 “법적인 잣대”는 1980년 대법원에서 확정된 “광주사태”의 배후세력으로 내란음모죄로 기소되어, 그 수괴인 김대중에게 내려진 사형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1997년 대법원에서 내려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결정과, 2004년 대법원에서 김대중 내란사건”을 재심한 후 내려진 “무죄”는, 잃어버린 10년에 이루어진 빨갱이 대법원 판사들에 이루어진 불공정한 판결이므로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지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죠?

      같은 대법원 판결이라도 앞에것은(김대중 내란음모 및 광주사태) 법에 근거해서 아주 공명 정대하게 판결한 거고, 뒤에 내린 무죄판결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야합한 정치판사들이 시대에 편승하여 내린 불공정한 판결이다 라고 생각하는거, 그게 바로 님의 생각이고 이곳에서 듣고싶은 말씀 아닌가요?

      그런데 이를 어쩐다?

      이곳은 그래도 다들 나름 한다 하는 인텔리(?)들이 주로 찾아오는 게시판인데…

      님의 논리로는 도저히 이분들과 상대가 안될것 같네요..
      =========
      ㅎㅎㅎ 2010-09-10 02:00 174.♡.224.222
      같은 대법원 판결이라도 앞에것은(김대중 내란음모 및 광주사태) 법에 근거해서 아주 공명 정대하게 판결한 거고, 뒤에 내린 무죄판결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야합한 정치판사들이 시대에 편승하여 내린 불공정한 판결이다 라고 생각하는거, 그게 바로 님의 생각이고 이곳에서 듣고싶은 말씀 아닌가요?
      —>

      물론, 김대중 내란음모 판결은 불공정한 판결이고 김대중 내란음모는 무죄라는 판결은 옳은 판결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죠. 문제는 이런 생각이 옳고 북진통일님이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말을 할 수 있냐라는 것입니다.

      제생각으로는 둘다 옳을 수도 있고 둘다 틀릴 수 도 있다라는 것입니다. 같은 사건을 두고 두가지 판결에 대해서 어느 쪽만 옳다라고 말을 할 수 없다라는 것이 제생각입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같은 사실에 대해서 역사적인 평가가 다르듯이 누가 압니까?

      몇십년 뒤에 광주민주화 운동이 다시 광주사태로 다시 역사적인 평가를 받을지…

      그리고, 몇십년 뒤에 김대중/노무현에 대한 역사적인 정확한 판단도 나올지 어떻게 압니까? 그때 쯤 되면, 김대중/노무현에 대한 비자금도 철저하게 공개가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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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답 2010-09-10 07:44 67.♡.21.216
      ㅎㅎㅎ//재판이 철학이나 정치라면, 아니 법이라면 시대에 따라 변할수도 있겠죠.

      그러나 법에 의한 재판은 사실관계의 규명입니다.

      살인을 한 사람이 사형 언도를 받았다가 나중에 감형되거나, 똑같은 살인을 해도 언제는 사형, 무기, 징역 10년등 양형이 다를수는 있지만, 살인한 사실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죠.

      김대중 내란음모?

      그 당시 김대중이 처한 역사적인 상황 (군인들에 의한 가택연금)만 보더라도 그가 광주사태를 배후조정할 수 없는 위치라는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습니다.

      뭐 그런 상황에서도 어떻게 해서 광주사태를 조정했다고 하더라도, 배후 조정했냐/안했냐의 사실 관계가 바뀔 수는 없는데 왜 재판에서 때때로 바뀔까요?

      분명 두 재판부중 한곳은 판단을 잘못한건데 (징역 20년이냐 25년이냐가 아닌, 유죄/무죄의 상반대 판결), 어느 재판부의 판결을 받아들이는것은 님의 마음입니다만, 남들에게 강요하진 마세요 ^^

    • tracer 198.***.38.59

      internet cache for the win!!!

    • 만주정벌 24.***.236.238

      백업본을 올려주신 간접경험님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의 소중한글이 날아간줄알고 마음이 않좋았었는데 다시 그 글들을 보니 너무 반갑고 기쁩니다.

    • 만주정벌 24.***.236.238

      간접경험님의 글가운데서도 등장하듯이 광주에서도 초기에는 단순한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 요구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시위는 대부분 학생들과 전경들의 대치로 이어지고 해가지면 해산하고 다음날 다시 모이고 하는 식의 전형적인 학생데모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평화적인수준의” 학생 데모가 어느날 부터 경찰들과 학생들은 대부분 2선으로 물러서고 공수부대와 시민군이라 불리는 두 집단의 대결 양상으로 바뀌게 됩니다. 바로 여기서 부터 사람들이 논쟁을 시작하는 소위 광주사태 혹은 광주항쟁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광주사건의 원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세가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1)전두환과 신군부세력의 정권탈취 과정에서 계획적으로 진행된 사건이다. 2) 김대중과 그 추종세력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 배후에서 조종한 사건이다 3)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이후 권력쟁탈전에 돌입한 삼김의 무책임한 세력 다툼 과정에서 발생한 우연한 사건이다. 물론 세가지 원인다 큰틀에서 보아야 이해될 수 있는 원인들입니다. 하지만 세가지 이유 모두 광주지역 대학생 시위가 광주 민군경 무력 충돌 사건으로 확대되는 결정적이고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허술한 면이 많습니다. 당시 현장에서 가족을 잃은 민간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공수진압부대원들을 가해자로 규정할것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그건 너무나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평화로웠던 학생시위가 어느날 갑자기 광주사건으로 확대되는 직접적 원인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to be continued)

    • 정당성 66.***.29.122

      광주민주화 운동이냐 아니면 폭동이냐 대한 논쟁에 있었는데 제 개인적으로 이 사건을 역사적 정당성이 부여 되여있는지 여부로 의견을 개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제가 전문적인 역사학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글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여서 글의 내용이 중구난방이고 조잡하더라도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제 개인적 생각은 어떤 과거 정치적 사건을 규정할때 가정 큰 기준은 행위의 정당성 이고 이런 정당성은 소수의 권력자나 어느 특정 기관이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 다수의 합의된 정서 및 사고에 의해 부여 된다고 봅니다..
      물론 민중 다수와 다른 정서를 가진 소수는 항상 존재하고 사건 발생 시 단기적으로는 다수의 생각 및 정서가 항상 정당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 다수가 옳다고 생각했지만 정당하지 못한 많은 사건들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발생되는 사건이 아니라 과거의 사건들에 대해서 다수의 민중들은 역사적으로 정당한 사건인지 아닌지 바르게 판단 할 수 있고 이들의 정서가 바로 사건의 정당성여부를 규정하고 이렇게 정당성이 부여된 사건은 시간이 흘려도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정당성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소수 권련자들에 의해 정당성이 있는 것 처럼 규정
      사건들은 언젠가는 다수 민중들에 의해 정당성을 박탈당하고 정당하지 못한 사건으로 역사적
      규정이 변경 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정당성이 박탈된 경우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한 5.16군사 구테타 및 전두환 전 대통령의12.12 군사 구테타 등이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정권을 잡고 있을때는 이들이 행한 정당하지 못한 행위에 대해 국민의 정서와는 다르게 강제적으로 정당성을 부여 했읍니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의 정서는 이 정당성을 받아들이 지 않았고 일부의 사람들은 이에대해 강력히 저항을 했었지요.
      .
      역사적으로 보았을때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세계적으로 정당하지 못한 구테타 집단은 언제나 국민으로 부터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 받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구테타 집단이 가장 먼저하는 것이 방송국을 포함한 언론매체 장악 이고 극적인 이벤트를 활용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방송 및 언론매체는 바로 이들의 정당하지 못한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선전하고 홍보하기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이 되였던 것 입니다.

      박정희, 전두환 두 전대통령 모두 군사 구테타 이후 바로 방송 및 언론을 장악 했고 박 전 대통령은 육사 생도로 하여금 자신을 지지 하는 시가 행진을 하도록하여 정당성을 확보 했고 전 전 대통령도 삼청교육대 및 국민 정화운동등을 통해 정당성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단기간에는 권력의 힘으로 정당성을 가질 수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역사와 민중에 의해 정당성이 없는 행위로 규정받게 된다고 봅니다.

      그럼 광주문제는 어떨까요? 제 생각으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두환씨를 포함한 신군부세력에 정당성을 부여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물론 당시 신군부세력 및 소수 이해 당사들은 자신들이 행위가 정당화 하다고 주장 할 수도 있겠지만 대다수 민중들의 정서는 그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았고 이 정당화 되지 못한 집단에 대항하여 항거한 광주 시민들의 행위에 바로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대다수 민중들의 어떻게 정당성에 대한 정서를 표출 할까요? 제생각으로는 바로 규정된 사건에 대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항을 하느냐에 있다고 봅니다.

      한 예로 어떤 우익 단체에서 김구 선생을 테러리스트라고 묘사를 한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그 행위만 떼어 놓고 보면 소수의 사람들이 생각 하듯이 김구 선생을 테러리스트 또는 폭력집단의 수괴로 볼 수 도 있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김구 선생의 행위가 정당하지 못한 집단에 대항한 정당한 행동이라고 믿기에 그분을 단순 테러리스트가 아닌 애국지사로 추앙 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럼 어느날 법원이 김구 선생의 행위를 테러리스트라고 규정하는 판결은 내린다면 어떤 일이 발행 할까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결정에 분명히 강력하게 저항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87년 6.29 민주화 항쟁을 폭동으로 규정하면 어떤 일이 발생 할까요? 이 또한 강력한 민중의 저항들이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하지만 5.16 군사 혁명이 군사 구테타로 12.12 사건이 12.12 군사 반란으로 역사적 규정이 변경되었지만 이에 대해서는 어떠한 강렬한 저항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광주사태가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역사적 규정이 변경이 되었을 때도 대다수의 국민들의 정서는 이에 대해 저항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저의 생각은 대다수 사람들은 1980년 광주 시민들의 행위에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했고 이 정당성은 세월이 흘러도 쉽게 변화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원글님께서는 다시 광주민주화운동이 폭동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구테타 주역에서 구국의 영웅으로, 12,12 군사 반란이 혁명으로 규정이 변경되여도 대다수 국민들이 이 정당성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저항이 거의 없을 거라고 보고 계시는 지요?

    • 만주정벌 12.***.132.25

      먼저 질문에 대한 답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당장 말씀하신 12.12 군사 쿠데타를 군사 혁명으로 규정지을경우 국민들이 반감을 나타낼 확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그 이유로는 군사 쿠데타라고 하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어느 시대나 상황에서도 그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며 어떤 예외조항을 적용하더라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후 그 우두머리였던 전두환 장군과 그의 쿠데타 동조 세력들이 저지른 불법행위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전두환씨의 쿠데타가 인정받을 수 없는 이유는 그의 쿠데타 과정에 지금 우리가 토론하고자 하는 광주사건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전두환씨의 군사 쿠데타와 광주사건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토론하고자 하는것은 광주 사건을 역사적 흐름속에서 어떤 선행된 사건과의 인과관계를 찾아 더 큰 역사적 의미를 도출해내자는게 아니고 광주사건을 독립된 사건으로 규정지은후 그 1980년 5월 광주에서 평화롭게 진행되던 학생시위가 민군경 무력 충돌사건으로 확대 결정적 원인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알수 있다면 그것이 광주사건인지, 광주사태인지, 광주폭동인지, 광주항쟁인자 혹은 광주민주화운동인지 자연히 이름붙여질 것입니다.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논리일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주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이유는 그 역사가운데 여러분들이 계속 지적하셨던 “사실”들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광주사건이 발생한지 30년이 지난 지금 그날의 영령들은 민주열사가 되어 망월동 묘지에서 거룩한 선열들이 되어있고 당시 나라 전체를 호령하던 전두환씨는 백담사를 거쳐 이제는 경호원이 대동해야만 바깥 출입마저도 가능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승자와 패자가 뒤바뀐거죠. 결국 이제는 승자의 논리가 역사라고 여겨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흔희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는 1980년 5월의 광주사건은 그런 의미에서 아직 진정한 역사적 의미 혹은 역사적 심판을 논할 단계는 아닙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생존해 있는 상태에서 서로가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승자가 바뀔때마다 사건의 의미가 달라지니까요. 그런건 “진정한”의미의 역사가 아닙니다. 어느분께서 말씀하셨듯이 역사는 사실에 기초해야 하고 그 사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BS 209.***.110.58

      http://www.tcr.org/tcr/essays.htm#emersonessays

      간접경험님 컴퓨터에 이전글 굴비가 저장된 이후에 제가 올린 답글이 하나 올라간 모양입니다.
      위에 올려드리는 링크는 전 세계 고등학생들이 제출한 에세이 중에 우수상을 받은 역사 논문입니다.
      저는 고등학생을 가르치고 있지만, 이 학생들 보다고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입니다.

      다만 위 에세이를 잘 읽어 보시면, 역사적 사실에 관해서 자기의 주장을 할때 어떻게 사료를 수집, 연구, 이해, 사용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이런 진지한 토론에 사용되는 주장은 적어도 이정도의 기준을 가지고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되어서 올려드립니다.

    • 오마이 24.***.147.135

      만주정벌님 말처럼 시대가 흘러, 다시 5.18이 재조명되는 과정에서, 지금의 색깔이 변색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사태’라든지, ‘폭동’이란 부정적 수식어가 붙을 가능성은 만주정벌님에게는 죄송한 얘기지만, 거의 없다고 봅니다.
      수백명이 죽었습니다. 5000년의 역사서에서, 민중이 목숨을 걸고 권력층에 대항한 경우중, 악질적 선동에 의한 불순한 의도에 의해서 발생한 경우 한가지만 들어주십시요. 그럼 5.18도 훗날 폭동으로 치부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겠습니다.

    • 리키 67.***.186.35

      만주정벌/
      “광주지역 대학생 시위가 광주 민군경 무력 충돌 사건으로 확대되는 결정적이고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허술한 면이 많습니다.”

      먼저 79년 부마사태로 가보겠습니다.
      광주학살의 비극은 이미 부마사태(?)에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그 당시 위수령을 발동하여 공수부대를 동원 시위를 진압했습니다. 총기 발포만 없었을 뿐 무자비한 진압은 시위대와 일반시민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과격한 시위에 분노한 시민들이 학생들을 도와주게 되면서 부마항쟁은 학생들만의 시위가 아니라 일반시민이 자발적으로 가세하는 민중항쟁으로 변화했습니다. 그리고 김영삼을 국회의원에서 제명한 것이 시위가 일어나게 된 주요원인 중에 하나입니다.

      80년 광주의 정서는 그 당시 대한민국의 일반적인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 아시는 내용이지만 80년 5월 17일 전두환 그 당시 계엄사령관은 비상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였고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광주에서 정확히 말하면 전남대 앞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고 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공수부대는 무자비하게 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합니다. 이 과정에서 일반 행인들도 공수부대에 폭행, 살상 당하게 되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 부분이 님께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신것 같습니다. 왜 공수부대가 일반시민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고, 그리고 왜 일반시민들 은 공수부대처럼 무시무시한 군인한테 두들겨 맞고 죽어 나빠지는 거 보면서도 집에 숨어서 잠자코 있지 않고 바보같이 시위에 동참했는지)

      5.17 쿠테타는 신군부에 의해 철저히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일어났음은 이미 다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쿠테타 이후 시위에 대비하기 위해 군에 과도한 충정훈련을 시킨 것이나 북한을 상대로 싸워야 할 군인을 그것도 특수 부대를 학생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대학교에 주둔 시킨 점 등은 이미 유혈사태를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소위 5월 21일 발포 이전에 이미 무자비한 진압으로 인한 살상이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전두환의 쿠데타가 실수한 단 한 가지가 여기에 있습니다.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는 이에 반대하는 국민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부마사태와 같은 방식으로 아니 좀 더 강하게 밀어 부쳐서 어떤 본보기로 삼을 희생양이 필요 했던 것 같습니다. 국민들을 겁먹게 만들어서 아무소리 못하게 막으려는 것이 목적인데, 광주시민들은 용감하게 일어났습니다. 부마사태에서 재미 좀 본 진압방법을 광주에 또 다시 사용한 것이 그들에게는 화근이었습니다. 신군부에서 시민들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까요?

      다시 부마항쟁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현지를 시찰하고 내린 결론입니다.

      “제가 내려가기 전까지는 남민전이나 학생이 주축이 된 데모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지에서 보니까 그게 아닙니다. 160명을 연행했는데 16명이 학생이고 나머지는 다 일반 시민입니다. 그리고 데모 양상을 보니까 데모하는 사람들도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에게 주먹밥을 주고 또 사이다나 콜라를 갖다 주고 경찰에 밀리면 자기 집에 숨겨 주고 하는 것이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들이 완전히 의기투합한 사태입니다. 주로 그 사람들의 구호를 보니까, 체제에 대한 반대, 조세에 대한 저항, 정부에 대한 불신 이런 것이 작용해서, 경찰서 11개를 불질러 버리고, 경찰 차량을 10여 대 파괴하고 불지르고, 이런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들도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시민들도 동참하게 되리라는 것을
      착각한 것은 부마사태처럼 무력진압하면 시위가 가라앉고 여론을 무마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들에게 광주는 쿠데타의 빙점이었습니다.

      “광주를 타격하고 쿠데타를 완수한다.”

      분명한 것은 5월 21일 도청 앞 발포 이전에 이미 무수한 학생과 시민들이 공수부대의 폭력앞에 희생되었다는 것이고 분노한 시민들이 도청 앞에 모여들자 이에 대한 군의 대응은 더욱 강력한 대응이었습니다.

      “다 짓밟아버려.”

      그들이 떠나고 다시 돌아오기까지 일주일 동안 광주는 정말 외롭게 고립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증언합니다. 평화로운 일주일이었다고. MBC 방송국 방화를 빼고는 그 어떤 범죄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조폭들도 한마음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내게 있어서 80년 광주는 우리 마음에 빚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댓글을 쓰면서도 마음이 뭉클해지고 울컥하면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이 오늘날 그래도 정의로운 가치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80년 광주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광주에서 일어난 그날의 비극을 잊지 않고 그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고 우리 모두가 노력했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그것이 사람이 사는 도리니까 그런 거 아니냐고?
      광주는 잠자고 있던 우리의 양심을 뿌리부터 송두리째 흔들어버리고 우리 현대사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게 했으며 우리가 스스로 그 치부를 치유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유롭게 생각을 펼칠 수 있는거 그냥 온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기 미국이니까 상관없어라고 생각하시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당시 광주시민의 분노는 우리의 양심의 분노가 그들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 만주정벌 12.***.132.25

      오마이님,

      저는 지금 오마이님이 선전선동을 하고 있다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단지 오마이님의 글속에서도 말씀하셨던 선전선동의 예가 보이고 있습니다. 1980년 5월 광주사건당시나 그후로도 오랬동안 광주시민단체측에서는 광주사건 희생사망자수가 2천에서 수천명에 이른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주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때는 사망자수가 5천명이 넘는다고 말까지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오마이님께서 처음에 지적하셨던 저의 입장, 죽 이게 무슨 북한의 선전선동에 의한 빨갱이 조작 사건으로 몰아가려는게 아니냐라는 시각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런 수준의 시각이었다면 단순히 전두환장군을 복권시켜라 한마디면 제의견은 충분히 피력되고도 남을것입니다. 하지만 저의 입장은 그런게 아닙니다. 우리 시대는 이미 전두환이라고 하는 한축을 광주사건의 주범으로 지목했습니다. 그렇다면 전두환을 주범으로 지목함으로써 광주사건의 사실성에 입각한 법적 책임이 모두 해결되고 이해될수 있느냐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구체적으로 전두환이 광주에서 첫번째 사망자가 발생하는 사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도 따져보자라는 것입니다(예를 들자면). 공식적으로 광주사건 최초 2일간에 발생한 사망자수는 2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중 한명은 장갑차에서 지상으로 발사한 위협사격의 실탄이 튀어오르면서 그 유탄을 맞고 사망한것으로 되어있고 또다른 사망자는 군경이 아닌 시위대 자체의 사고로 사망한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광주사건이 단순한 폭동이 아니었다라는걸 증명하기 위해선 단순한 폭동으로 보일수 밖에 없는 사실들을 하나하나 지워나가야만 합니다. 어느분의 말씀들처럼 광주사건의 기원을 부마사태를 시작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기타 그 전부터 이어져왔던 정치상황과 연결지으려 한다면 저도 할말이 없습니다. 저역시 그전에 일어났던 정치상황과 광주사건은 서로 “대단히”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정치 상황적 연계성은 광주사건의 배경은 될 수 있어도 직접적 원인은 되지 못한다고 봅니다. 만약 그런 정치적 연계성을 사건의 직접적 동기로 규정지기 시작한다면 우린 광주사건의 시발점을 그보다 훨씬 더 이전의 어떤 역사적 사건으로 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시발점의 선택은 다시한번 숭자들에 의해 결정될것입니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오마이님께서 질문하셨던것, 즉 우리 역사상 목숨을 걸고 권력층에 대항한 경우 그것이 악질적 선전 선동에 의한 경우가 있었는지는 알수 없으나 그렇기 때문에 광주사건도 그런경우가 아닐것이다라는 논리는 설득력을 얻기가 힘들것이라 생각딥니다.
      얘를 들어보겠습니다. 광주사건을 조금이라도 자세히 들여다 보신분들이라면 윤상원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기억할것입니다. 시인 박노해씨는 윤상원이라는 사람을 거의 혁명의 불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윤상원씨와그 주변인물들에 대한 광주사건 당시 행적을 사실 관계에 입각해 살펴보면 광주사건을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윤상원씨는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아있다가 계엄군의 진압작전 과정에서 총격으로 사망합니다. 윤상원씨와 뜻을 같이 하고 마지막까지 윤상원씨의 곁에서 그의 죽음을 목격했던 당시 생존자등의 증언에 의하면 윤상원씨는 일종의 프로레타리아 무장봉기를 꿈꾸었던 인물이라고 합니다. 그는 광주사건의 초기단계에서부터 마지막 단계 이르기까지 깊숙히 관련되어 여러 형태로 광주사건을 진행시켜왔으며 리키님의 글가운데 언급된 평화로운 일주일을 “해방구”의 기간으로 선포하고 받아들였던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태가 급변하기 시작하던 5월 19일에 나온 구호들중에는 “광주시민을 주축으로 위대한 전남국을 만들자”라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전남국은 단순히 우리가 말하는 지역감정적 전남국이 아니라 “해방구”의미입니다. 즉,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국시를 부정하고 특정계층(프로레타리아)의 사람들이 모여서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전두환 군사정권에 대한 항거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나라 자체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행위입니다. 특히 윤상원씨는 광주사건 기간동안 대부분의 투쟁속보라는 유인물을 만들어 조직적으로 시내에 배포했던 인물입니다. (to be continued)

    • 오마이 24.***.147.135

      윗글 서두엔 선전선동으로 보지 않으신다고 하면서, 말미부분은 5.18에서 선전선동을 했을 듯한 인물을 드셨네요. 권력에 대해 봉기하는데, 당연히 그런 인물들이 빠지진 않겠죠. 누가 시작했건, 국민들이 동참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그러고 전 우리 민족 5000년 역사에서, 민중이 권력층에 대항해 자발적으로 목숨도 불사하면서 봉기한 사건중에, 일부의 이익을 위해서, 악질적 선전선동에 의한 경우가 있냐였습니다. 제가 질문을 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런 경우가 없기때문입니다. 만주님은 계속해서, 5.18에 대해서, 사건의 의도와 원인보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몇몇 사건, 사고의 예를 들면서 5.18에 대한 가치를 저평가하시고 계십니다.
      속 시원하게 5.18 어땠다라고, 님 생각을 안 하시니, 전 5.18에 대한 만주님 글 쭉 읽으면서, 그런 느낌 받습니다. 만주님이 5.18 선전선동에 의한 폭동이라고 보시는거 같은데요. 5.18이 민주화운동였다는 것에 대해서, 반박하는 글을 이유는 그것때문이 아닙니까.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건전한 의견차이라고 보고싶습니다.

    • 만주정벌 24.***.236.238

      제가 말씀드린 선전선동으로 보지 않는다라는 말은 광주사건에 관해 특정 의견 집단이 말하는 것처럼 북한 정권에 의한 조직적이고 직접적인 선전선동 전략은 없었을거란 뜻입니다. 하지만 선전선동이란 단어는 단순히 북한정권이 사용하는 대남 공작 전술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누구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실과 다름을 “알면서도” 그것이 사실인것처럼 말하고 돌아다니는 것도 모두 선전선동의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 만주정벌 24.***.236.238

      선전선동에 대한 이야기는 광주사건의 미스테리를 푸는 결정적 열쇠인지도 모릅니다. 초기의 평화적 시위가 진압군과 시민군 사이의 무력충돌로 확대되는 계기를 아주 정확하게 짚어가는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공수부대는 사실 전라도에만 투입된게 아니었습니다. 당시 광주뿐 아니라 전국의 모든 대학에 공수대 요원들을 배치했었습니다. 단순히 공수대가 나타났기 때문에 그것이 과잉진압이라고 말하는것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이미 알려진바와같이 평화적이던 광주의 초기 시위는 윤상원 본인이 직접 목포로 빼돌렸던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이 살해당했다는 소문으로 인해 마치 휘발유에 불이 붙듯이 일순간에 악화됩니다. 그리고 그 소문은 박관현을 목포롤 빼돌린 윤상원 자신이 도청앞에서 시민들에게 이야기한것입니다. 간접경험님께서도 몇번 말씀하셨듯이 광주시민들은 당시 학생들의 시위가 있는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동조를 하지도 않았고 사실 대부분의 시민들이 전두환이라는 이름조차 들어본적이 없었습니다. 광주사건이 끝나고 수년후 당시 민간인 생존자들 스스로가 고백한 내용입니다. 당시에 그들도 전두환이 누군지 들어본적도 없었지만 시위지도부에서 전두환 욕을 하기에 자신들도 그냥 나쁜놈일거라는 가정하에 따라간거라고. 전 여기서 시민들이 아무생각없이 따라다녔음을 지적하고자 하는것이 아닙니다. 어느 시위나 지도부는 시위대의 분위기만 띄우고 자신들은 사라지는게 주요 임무기 때문입니다. (이건 제가 87년 6월 항쟁때 NL계열 점조직에서 시위 바람잡이 교육을 받고 실전(?)에서 많이 해보아서 잘알고 있습니다. 이이야기는 나중에 더 자세히…). 제가 지적하고 자하는것은 윤상원이라는 자의 거짓말 한마디가 결국 말그대로 평화롭던 광주시민들의 삶을 광주사건의 불구덩이속으로 끌고들어가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광주시민들은 사실 그렇게 적극적으로 시위에 가담도 하지 않았고 주로 학생들끼리 모여서 평화로운 시위정도만 하고 있었습니다. 합수부에서 광주사건에 김대중씨를 연결시키는 이유중의 하나는 윤상원이라는 인물이 바로 김대중씨의 전국 연합 사무국장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이미 전두환이라는 인물을 광주사건의 한축으로 지목했습니다. 그렇다면 광주사건에 다른 축은 존해하지 않는걸까요? 혹시 그축은 스스로를 피해자로 가장하고 지금껏 국민과 역사를 기만하고 있는건 아닐까요? 제가 초기에 언급했던 광주사건이 우발적 사고였을지도 모른다라는 의미는 이런것입니다. 간접경험님의 말씀처럼 광주시민들은 평화로운 상태였습니다. 전국 어디서나 발생하던 산발적 학생시위정도가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느순간부터 마른 장작에 불이 붙듯 어떤 작은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광주시민들은 그 사건에 빨려들어갑니다. 대부분의 광주시민들은 순수했습니다. 죽어나가는 어린 학생들 청년들을 위해 김밥을 만들어주고 물을 갖다주고 치료해주고 빨래를 해주고..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서로가 서로를 돕고 가해자들로부터 광주를 지키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도 당당할 수 있는것입니다. 본인들의 말처럼 본인들은 잘못한게 없으니까요. 그래서 떳떳한겁니다. 하지만 그 발화점, 즉 마른장작에 불을 당긴 그 발화점은 광주시민들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이유일지도 모른다는겁니다. 바로 이부분이 우리가 반드시 역사앞에 죄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겁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얼마전에 광우병 사태가 있었습니다. 남녀노소 수많은 국민이 들고 일어나서 나라를 송두리째 뒤집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순수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길거리로 뛰쳐나가도록 만들었던 그 발화점은 결국 “의도적으로 조작된 거짓말”이었음이 명백하게 밝혀졌습니다. 우린 그런 경우도 광우병민주화운동이라고 칭하고 길거리로 뛰어나온 모든 사람들을 광우병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영웅이라고 칭해야 하나요? 전 길거리로 뛰쳐나온 시민들이 바보라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피해자입니다. 그리고 가해자는 정부가 아니라 그런 거짓말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뿌린 방송제작팀이라는거죠. 마찬가지의 이유로 지금 광주망월동에 묻히신 분들이 폭도가 아니라 피해자라는 겁니다. 그리고 광주시민들 모두 피해자입니다. 그리고 당시에 진압군으로 출동한 군경 모두도 피해자입니다. 그리고 가해자는 바로 군경과 시민들을 의도적으로 무력충돌로 몰고간 그 어떤 세력이라는 거죠. 우린 바로 그 어떤 세력을 색출해야합니다. 아직까지 어딘가에서 웃고 있을 그 세력을 잡아내야 합니다. 광주 망월동에 묻히신 분들이 진정 광주를 사랑했고 그래서 가족과 친구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떨쳐일어난 그 정신을 영원히 역사에 기록하기 위해 우린 그 진짜 범인을 색출해내야 합니다.

    • 만주정벌 12.***.132.25

      광주사건 초기에 대단히 많은 대자보와 투쟁속보들이 등장합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소문중이 하나가 경상도 춣신의 공수대가 호남인들 씨를 말리러 왔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최초 집압군으로 투입된 제 7 공수는 부대원 40%가 호남출신인것으로 밝혀졌습니다. 7공수가 광주사건에 초기 투입된 이유는 그들이 부마사건을 진압한 부대엿기 때문입니다. 즉, 7공수는 전라도 집압군이기 이전에 이미 경상도 집압군으로 투입되었던 부대라는 것입니다. 광주민주화 운동을 주장하는 논리중에 하나가 군부독재와 군사정권에 대한 항거라는 말을 합니다. 한가지 아이러니 한것은 공수부대가 투입되기 직전에 최규하 당시 대통령이 직접 광주시를 방문한다는 것입니다. 즉, 최규하 문민 대통령 정권이라는 것이죠. 당시 10.26 발생후 전두환 장군이 지휘하는 합수부가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엄연히 대통령은 최규하씨였고 문민정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정권하에서 전두환이라는 이름도 제대로 들어보지 못햇던 광주시민이 어째서 군부정권 타도를 외칠까요? 아시다시피 광주사건이 발생되기 훨씬 이전에 함석헌 목사와 김대중씨를 비롯한 4인의 재야 대표가 모여서 정부에 민주화 일정 요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5월 22일을 데드라인으로 정해놓고 그이전에 발표가 안나올 경우 전국 봉기를 하겠다고 이미 선언을 한 상태였습니다.

    • 노 일평 67.***.40.2

      특정인, 특정세력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또는 시간 흐름이 마음에 안든다고 무기고 탈취해 정부에 무력으로 대든다면 이미 그건 나라도 국민도 존재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이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국민은 엄청난 가치관 혼동과 분열을 경험했고 작금에 그 부작용이 우리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 ??? 62.***.236.96

        이건 또 무슨 개소리?
        특정 세력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무력을 쓴건 전대갈이지 어떻게 이런식으로 광주시민들한테 책임을 뒤집어 씌우냐???

        그럼 무력항일운동 한 사람들도 존재가치가 없다는거냐???? 생각좀 하고 살자 응응응????

        • 삭제요령 71.***.118.39

          5844 삭제요령좀 알려주세여(2) 이진애 2010-09-18 511

          글쓴이 : 이진애 (67.♡.40.2) 조회 : 511
          이 곳 게시판에 쓴 글을 삭제하려는데, R표지만 있고 X(삭제) 마크가 없군요.어떻게 올린 글을 지울 수 있나요?


          운영자 10-09-19 17:25 143.♡.245.15
          어떤 글을 지우고 싶으신 지 말씀해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운영자 드림


          노일평 10-09-20 16:40 67.♡.40.2
          삭제하려는 글은 정치토론방의 #14 원글밑의 노일평이란 이름으로 썼던 글입니다.삭제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 만주정벌 12.***.132.25

      12.12 사건이 군사 쿠데타라는 점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10.26 사건 당시 정승화씨는 궁정동 안가에 김재규의 초대를 받고 별관에서 대기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현장에서 총격 사건이 발생한 직후 정승화씨와 김재규는 함께 차로 이동하면서 행동을 같이 합니다. 훝날 사람들은 이것이 김재규의 결정적 실수였다고들 말하곤 하지요. 그날밤 정승화를 데리고 남산 정보부로 들어갔어야 했는데 너무 경황이 없어서 정승화의 육본 벙커로 들어간것이 김재규 스스로 호랑이 굴로 들어간 실수고 거사 실패의 결정적 원인이었다고. 어쟀든 이점에서 볼때 정승화씨가 합수부의 의심을 충분히 받을만하고 초기단계에서 수사대상에 오르는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의미에서 12.12는 단지 하급자가 상급자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연행했으니까 하극상에 의한 군사반란이란 논리는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전두환의 신군부가 합수부에 초법적인 양대 정보 장악권을 부여하고 결과적으로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하도록 압력을 넣었떤 부분이을 일종의 쿠데타로 봐야할것입니다. 최고 통지차의 지시를 받아 움직여야할 군부가 오히려 최고 통치자를 하야 시키고 본인들이 최고 통치자가 되었으니 그부분이 쿠데타라는 거죠.